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번외편1. 파르마 공작부인 마르가레테 : 카를 5세의 딸

엘아라 2012. 9. 1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그냥 넘어갈려다가 카를 5세의 딸네미 다 하기로 했습니다. 

파르마 공작부인이 되는 마르가레테는 카를 5세의 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생아"였습니다. 

카를 5세는 마르가레테는 인지하고 법적으로 자신의 딸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마르가레테는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라는 이름을 쓰게 됩니다만 적자들에게만 쓰던 여대공 칭호를 쓰지는 않은듯합니다.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번외편1. 파르마 공작부인 마르가레테 : 카를 5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피렌체 공작부인

파르마 공작부인

네덜란드의 총독

Margaret, Duchess of Parma 

(28 December 1522 – 18 January 1586)



후에 파르마의 공작부인이 되는 마르가레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와 플랑드르 지방의 귀족 출신 여성인 요한나 반 데어 그힌스트(Johanna van der Gheynst)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요한나는 플랑드르 상인의 딸로, 귀족의 하녀로 일하다가 궁정에서 카를 5세와 만나게 됩니다.  카를 5세는 네덜란드에서 교육받는동안 잠시 아름다웠던 요한나와 사랑에 빠졌고 요한나는 1521년에서 1522년 사이에 그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딸인 마르가레테가 태어납니다. 아이는 브뤼셀에 있는 가문에 맡겨지게 됩니다. 요한나는 이후 카를 5세와 헤어졌는데 카를은 요한나에게 연금을 줬으며 좋은 혼처도 찾아줬다고 합니다.



마르가레테의 부모 카를 5세와 요한나

(19세기 그림)


마르가레테라는 이름은 카를 5세의 고모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딸인 네덜란드의 총독 마르가레테의 이름을 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곧 마르가레테의 보호를 받으면서 궁정에서 성장합니다. 총독이었던 마르가레테가 죽은후 카를 5세의 여동생이자 헝가리 왕비였던 마리가 네덜란드 총독이 되었으며 그녀 역시 조카인 마르가레테를 보살피게 됩니다. 마리는 매우 지적이며 활동적인 여성이었기에 조카인 마르가레테 역시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되고 마르가레테는 공주들과 같은 교육을 받게 되죠.


카를 5세는 마르가레테가 7살 무렵이던 1529년 자신의 딸로 인지합니다. 아마 마르가레테를 인지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문제때문이었을듯합니다. 인지하기전인 1526년 카를 5세는 이탈리아쪽의 영향력을 위해 마르가레테의 혼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카를 5세는 교황 클레멘트 7세의 조카인 피렌체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일모로)와 마르가레테를 결혼시키기로 합니다. 결혼협상이 끝난것이 1529년이었기에 아마도 마르가레테와 그의 결혼조건중 하나가 황제가 딸을 인지하는것이었을듯합니다.



마르가레테의 첫번째 남편

알레산드로 데 메데치 (일모로)

피렌체 공작



1533년 마르가레테는 이탈리아로 보내집니다. 피렌체 공작 부인이 될 그녀가 이탈리아식 교육을 받고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였을듯합니다. 그리고 1536년 피렌체 공작과 결혼하게 되죠.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결혼 1년만에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피렌체 공작 지위는 친척인 코시모1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코시모 1세는 마르가레테와 결혼하길 원했고, 마르가레테 역시 그를 원했다고 합니다만 카를 5세는 딸을 코시모 1세와 결혼시키지 않고 대신 다른 정략결혼에 이용합니다.


1538년 마르가레테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손자였던 옥타비오 파르네세와 결혼하게 됩니다.(바오로 3세는 성직자가 되기전 자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마르가레테보다 한살 어렸죠. 바오로 3세는 교황이 되자 자신의 가문이 권력을 가지도록 노력했었죠. 이때문에 교황과 잘지내려던 카를 5세는 딸인 마르가레테를 옥타비오와 결혼시킨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르가레테와 옥타비오 사이는 불행했다고 합니다. 특히 마르가레테는 자신보다 어린 남편을 못마땅해했다고 합니다. 또 교황과 황제 사이가 안 좋았던것역시 부부 사이가 나쁜 원인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마르가레테의 두번째 남편 

옥타비오 파르네세

파르마 공작


파르네세 가문은 파르마의 통치자로 인정받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었는데 이것은 에스파냐의 승인으로 실현될수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마르가레테가 가문의 후계자를 낳았기 때문이었죠.


1555년 파르네세 가문이 파르마의 통치자로 인정받은해에 마르가레테는 늘 떨어져지내던 남편과 완전히 떨어져지내게 됩니다. 그녀는 아들이자 파르만 공작령의 후계자였던 알레산드로를 데리고 네덜란드로 떠납니다. 남동생인 펠리페 2세에게 아들의 후원을 맡기기 위해서였죠. 네덜란드에 온 마르가레테는 고모 마리나 대고모 마르가레테 처럼 네덜란드의 총독이 됩니다. 펠리페 2세는 자신의 이복누나에게 네덜란드를 맡겼죠. 마르가레테는 매우 능력있는 여성이었기에 네덜란드 총독직을 수행하는데 기본적으로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만 당시 네덜란드 정세가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종교문제때문에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는것에 점차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고, 펠리페 2세는 이런 네덜란드를 무력으로 진압하려했습니다. 마르가레테는 어떻게든 중재를 하려 했으나 결국 펠리페 2세가 알바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진압군을 보냈습니다. 이때 마르가레테는 동생에게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경고 했으며, 총독직을 사임하게 됐을때는 네덜란드의 일이 잘못되는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펠리페 2세의 책임이 더 크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알바 공작앞에서의 마르가레테

(19세기)


1567년 마르가레테는 네덜란드 총독직을 사임한후 이탈리아로 은퇴합니다. 그곳에서 아들인 알레산드로와 동생인 후안의 정치적 조언자가 되죠. 1578년 마르가레테의 아들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펠리페 2세에 의해서 네덜란드 총독이 됩니다. 이때 마르가레테는 아들과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죠. 펠리페 2세는 둘이 서로 균형을 맞춰가면서 네덜란드의 문제를 처리하길 바랬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와의 공통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마르가레테는 결국 1582년 나무르로 은퇴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펠리페 2세에게서 이탈리아로 돌아가는것을 허락받아 이탈리아로 돌아갑니다. 



마르가레테의 아들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어린시절 펠리페 2세의 군대있을대 모습



마르가레테는 1586년 사망했으며 그녀의 남편 역시 같은해 사망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카를 5세의 서녀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