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왕비가 되지 못한 국왕의 어머니들...(1)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엘아라 2012. 6. 1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월요일 시리즈를 갈아엎을려고 하는데 뭐 할것이 없더라구요. (네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졌습니다. 요즘은 바로크 오페라들도 잘 안듣거든요..--;;)

그런데 어디서 BBC에서 세익스피어의 잉글랜드 국왕 시리즈를 드라마로 한다고 하더라구요.그래서 그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하다가 리처드 2세 어머니에 대해서 시작할까 하다가 머리속에 딱 떠오르는 시리즈가 생각났습니다. 이거 한참 써먹을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죠.ㅎㅎㅎ


바로 왕비가 되지 못한 국왕의 어머니들이라죠. 리처드 2세의 아버지는 흑태자 에드워드 였고 어머니는 켄트의 조앤이었습니다. 흑태자는 국왕이 되기전 사망했기에 조앤은 왕비가 되지 못했죠.

어쨌든 이거 찾아보면 좀 있을것같아서 그냥 아무생각없이 시작해봅니다.

....많아야할텐데...지금 생각해보니 그다지 많이 없는거 같기도 하구요..ㅠ.ㅠ

대충은 좀 조사하고 해야지 이렇게 무대포로 시작하면 좀 안되는데 말입니다..-0-;;

일단 네명은 아니까....--;;;4주는 쓸수 있겠죠...쿨럭


잉글랜드 시리즈기 때문에 결국 공주님 시리즈는 스웨덴 공주님은 끝나고 나면 합스부르크가 해야겠습니다..ㅎㅎㅎ


왕비가 되지 못한 국왕의 어머니들...(1)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마리아 루이제 빅토리아

라이닝겐 공비

켄트 공작부인 

Princess Marie Luise Victoria of Saxe-Coburg-Saalfeld, 

Princess of Leiningen, 

Duchess of Kent 

(Marie Luise Viktoria; 17 August 1786 – 16 March 1861)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마리아 루이제 빅토리아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안톤과 그의 두번째 부인인 아우구스테 로이스 주 에르베스도르프 백작영애(후에 공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로이스 가문은 손 안대는것이 상책이라는..ㅠ.ㅠ 이 가문은 사실 오래된 가문이긴 한데 분가가 너무 심한데다가 가문들 중에서도 비 통치가문으로 나뉘기도 하고 엄청 복잡하더라구요. 작센 가문들도 만만치 않다는....ㅠ.ㅠ 결국 가문 이야기는 패스입니다.)

로이스 가문은 그리 큰 가문은 아니었습니다만, 아우구스테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알려져있었으며 아우구스테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딸을 자랑하고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해 딸의 초상화를 여기저기 보냈다고 합니다.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프란츠는 이런 아우구스테에게 반했지만 처음에는 결혼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가문에서 정해둔 여인이 있었죠.  같은 작센 가문 출신인 작센-힐데부르크하우젠의 조피와 결혼합니다만 그녀는 결혼한지 1년도 안되어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공작은 사랑하는 여인과 재혼하죠.



빅토리아의 부모

로이스-에르베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프란츠

프란츠의 아들인 에른스트는 후에 고타를 상속받는 대신 잘펠트를 다른 작센분가로 넘깁니다.

이때문에 이후 가문 이름이 작센-코부르크-고타가 되죠.


빅토리아와 그녀의 여러 형제들은 유럽의 여러 왕가와 결혼합니다. 남동생인 레오폴트는 영국의 왕위계승자였던 웨일즈의 샬럿과 결혼했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다 죽은후,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1세가 됩니다.  빅토리아의 오빠인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상속녀와 결혼했는데 그 아들인 페르디난트는 포르투갈 여왕의 남편이 되고 딸은 프랑스 국왕의 며느리가 되죠. 빅토리아의 큰오빠인 에른스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되었는데 그의 둘째아들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였습니다. 그리고 언니인 안토니에테는 파벨1세의 처남이었던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알렉산더와 결혼했으며 또다른 언니인 율리아네는 러시아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파벨 1세의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빅토리아가 처음부터 영국 왕위계승자의 어머니가 될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빅토리아는 17살이되던 1803년 라이닝겐 공 카를의 두번째 부인이 됩니다. 라이닝겐의 카를은 빅토리아의 이모부이기도 했었는데 그의 첫번째 아내가 죽자 아내의 조카인 빅토리아와 재혼한것이었죠.  둘의 나이차이는 무려 23살이나 됐다고 합니다. 이 결혼에서 빅토리아는 두명의 아이를 낳습니다. 바로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 언니 오빠인 페오도라와 카를이었죠.



라이닝겐의 페오도라

호엔로에-랑겐부르크 공비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언니


빅토리아의 첫번째 남편인 카를은 결혼 11년후인 1814년 사망합니다. 이에 빅토리아는 10살과 7살된 두 아이를 데리고 과부가 됩니다. 아들인 카를이 라이닝겐의 군주가 됩니다만 어렸기 때문에 빅토리아는 아들의 섭정으로 일을 하죠.


남편이 죽은 4년후 빅토리아는 재혼을 하게 됩니다. 영국의 켄트 공작 에드워드는 의회의 압력으로 자신의 신분에 맞는 여성과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인물이 바로 빅토리아였죠. 켄트 공작은 빅토리아 보다 19살더 많았습니다. 



켄트 공작 에드워드

빅토리아의 두번째 남편

그는 오래도록 정부들과 살았는데 조카이자 왕위계승자인 샬럿이 자녀없이 죽자 의회는 미혼인 왕자들을 서둘러 결혼시켰고 그와 형 윌리엄 4세도 이때 결혼했습니다.(동생인 캠브리지 공작도 이때 결혼했던가 기억이 가물거리는군요--;;)



재혼한 직후 빅토리아는 임신하게 됩니다. 빅토리아와 켄트 공작은 경제적 이유로 영국 밖에서 살고 있었는데  빅토리아가 임신하자 켄트 공작은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갑니다. 빅토리아가 낳을 아이는 영국의 왕위계승자가 될지도 모를 아이였는데 국외에서 태어나게 할수는 없었던 것이죠. 빅토리아 전 남편의 아이들 역시 어머니와 새아버지와 함께 영국으로 옵니다. 그리고 1819년 빅토리아는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라는 이름의 아이를 낳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영국을 60년 이상 통치하는 빅토리아 여왕이었죠.


하지만 딸이 태어난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켄트 공작은 사망했으며 빅토리아는 다시 과부가 됩니다. 이제 켄트 공작부인으로 불리게 되는 그녀에게는 건강한 딸 빅토리아가 있었으며 이 켄트의 빅토리아는 영국의 중요한 왕위계승자였습니다. 켄트 공작이 죽은지 6일후에 조지 3세가 사망했으며 이후 조지 4세가 즉위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조지 4세의 후계자였던 동생 윌리엄에게도 적자가 살아남지 못했죠. 결국 켄트 공작의 딸인 빅토리아는 추정왕위계승자가 됩니다. 이때문에 켄트 공작부인은 영국에서 살아야했죠. 그녀에게 영국에서 사는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켄트 공작부인은 영어가 서툴렀고, 주변에 사람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게다가 경제상황도 무척이나 좋지 않았는데 그녀는 남편이 죽은후 의회에서 그다지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하지만 남편의 빚은 그대로 상속받았죠. 켄트 공작부인을 도운것은 동생인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 1세였는데 그는 죽은 전처의 명의로 받는 연금을 누나에게 지원해줬다고 합니다. 



어린딸 빅토리아 공주와 함께 있는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딸이 왕위계승자였어도 남편 빚에 허덕였고, 영국측에서는 그녀에게 무척 짜게 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시아주버니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듯합니다.



이런 켄트 공작부인은 남편이 뽑았던 시종인 존 콘로이에게 점점 의지하게 됩니다. 존 콘로이는 켄트공작부인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켄트의 빅토리아 공주가 미성년으로 왕위를 계승해서 켄트공작부인이 섭정이 되어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길 바랬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켄트 공작부인은 존 콘로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고 존 콘로이는 켄트의 빅토리아 공주를 고립시켜 어머니와 자신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억압적인 삶에 대해 빅토리아 공주는 무척이나 반항적이 되었고 켄트공작부인과 사이가 점점 벌어집니다.


켄트 공작부인은 자신의 시아주버니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조지 4세나 윌리엄 4세는 대놓고 켄트공작부인을 비난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켄트 공작부인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더 존 콘로이를 의존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되죠.

이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를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켄트 공작부인 역시 딸에게 너무 모질게 대했습니다. 이를테면 빅토리아 공주의 열여덟번째 생일때 공작부인과 존 콘로이는 빅토리아 공주에게 "비록 성인이라도 자신은 섭정이 필요하다"라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고 합니다. 영국법률에서 열여덟살이 되면 섭정이 필요없었기 때문이죠. 윌리엄 4세는 공공연하게 켄트공작부인이 섭정이 되는 꼴은 절대 보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죠.



존 콘로이

야심가였던 그는 켄트 공작부인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것은 다른 친척들의 걱정거리였는데 공작부인의 동생인 벨기에의 레오폴 1세마저 그의 영향력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와 공작부인과의 관계는 미묘한것이었는데 빅토리아 여왕은 그와 어머니의 관계가 단순한 여주인-집사 이상의 관계였다고 생각했었던듯합니다.



1837년 드디어 켄트 공작부인의 딸인 빅토리아가 백부의 뒤를 이어 영국의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이때 이미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과의 사이는 극악이었습니다. 빅토리아는 어머니와 함께 살긴 했지만 자신의 방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방을 정하고 어머니를 권력에서 배제하고 어머니 주위의 인물에 대해 매우 부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켄트 공작부인은 켄트 공작부인대로 이런 딸에게 섬섬함을 느꼈고 이런 모녀간의 다툼은 여왕 통치 초기의 스캔들로 이어지게 됩니다.


켄트 공작부인과 빅토리아 여왕이 다시 어느정도 친해지기 시작한것은 빅토리아 여왕이 결혼한후 큰딸 빅키를 낳은 이후입니다.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켄트공작부인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그역시 공작부인처럼 독일에서 왔으며 영국 사교계에서 고립되어있었죠. 그는 아내가 가정교사인 레젠 영향력아래 있는 것을 못마땅해했는데 결국 큰딸이 태어난 이후 레젠은 떠났죠. 늘 여왕의 어린시절 켄트공작부인과 존 콘로이의 반대편에 섰었던 레젠이 사라지자 여왕은 어머니에 대해서 좀 덜 냉담하게 대하기 시작하고 앨버트 공 역시 아내와 장모사이를 중재합니다. 그리고 켄트 공작부인 역시 존 콘로이가 떠났기에 결국 모녀간의 사이는 점차더 개선됐습니다.


 켄트 공작부인은 손자손녀들에게 무척 관대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싫어했던 여왕이 아이들에게 잔소리만 하는것에 대해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 한적이 있는데 그때 여왕은 "어머닌 자녀가 하나밖에 없으셨잖아요"라고 대꾸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어린시절 어머니의 억압을 평생 아픈 기억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죽을때까지도 남아있던 응어리였죠. 하지만 여왕은 어머니가 죽은후 어머니가 자신의 어린시절 물건들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했던것을 보고 어머니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매우 아파했죠.





켄트공작부인 빅토리아

빈터할터 작품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