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솔직히 일본은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얼떨결에 고우-히메들의 전국을 살짝 보게 되어서 거기 나오는 여성들에 관심이 살짝 갑니다.
일본은 잘 모르는데 지방분권이 잘된곳 같더군요.-0-;;;우리나라는 조선시대인데, 일본은 저런 봉건 사회인것에 살짝 당황했습니다. --;;;
어쨌든 일본의 지방 통치자였던 다이묘들은 전국 시대에 마구 싸워댔고, 여기에 정략결혼등이 횡횡했던듯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대부분 인질이나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남편이 죽을때 같이 죽거나 아니면 그전에 친정으로 돌려보내지는등의 일을 당했던듯하구요.
여자들 무진장 많던데...아하하...결정적으로 제가 일본어를 못합니다. (...== 사극 몇편봤더니 일본 사극체에 익숙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쟈~~쟈~~이런 말이 이상하지가 않다는..ㅠ.ㅠ 진짜 주변에서 사극으로 외국어 배우지 말라는 충고가 이해됩니다. --;;)
첫번째 여성은 불운한 삶을 살았던 여성인 아케치 타마입니다.
호소카와 가라샤
아케치 타마
細川ガラシャ / 明智 珠(明智 玉)
(ほそかわガラシャ / あけち たま、俄羅奢)
永禄6年(1563年) - 慶長5年7月17日(1600年8月25日)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로 태어난 아케치 타마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알려져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명으로 15살에 명문가문인 호소카와가문으로 시집갑니다.
타마의 시아버지가 되는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교(京)에서 쇼군을 모시던 사람이었으며, 타마는 그의 장남인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시집간것이었습니다. 타마와 타다오키는 미남미녀로 유명했으며 둘은 결혼후 처음에는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케치 미츠히데
하지만 그녀의 삶이 뒤바뀐것은 아버지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지에서 살해하면서 시작됩니다.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는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과 오다 노부나가가 머물던 혼노지를 공격해서 그를 살해합니다.
혼노지의 변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직후, 각 장군들은 거취를 결정해야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믿을만한 세력이자 사위가 있었던 호소카와 가문은 이 사실을 알고는 단호하게 오다가문의 편을 듭니다. 타마의 시아버지인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바로 머리를 깍고 출가해서 이후 이름을 호소카와 유우사이라는 이름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다른곳에 있던 오다가의 가신들에게 알리죠. 타마의 남편 타다오키 역시 장인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호소카와 가문이 아케치 미츠히데의 편을 들지 않은 것은 결국 아케치 미츠히데의 고립을 가져오게 됩니다.
아버지가 전투에서 패해서 죽고 난후, 타마는 역적의 딸이 되었고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아내와 이혼하라고 요구하죠. 하지만 아내를 사랑했던 타다오키는 그녀와의 이혼을 거부하고 한 사찰에 유폐시킵니다. 2년간 유폐생활동안 타마는 매우 힘든 삶을 살았는데, 그녀는 기독교를 믿었던 시녀에게 무척이나 큰 위안을 얻었고, 이후 그녀가 개종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
1584년 권력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소카와 타다오키를 위해 특별히 타마를 용서해줬으며, 이 때문에 타마는 유폐에서 풀려서 집으로 돌아올수 있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후 타마는 남편과의 사이가 예전처럼 아주 좋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없을때 남편이 측실을 들였으며, 가족에게도 소외받았다는것이죠. 어쨌든 아버지의 죽음과 유폐생활등 불행한 삶을 살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듣고 매료당합니다. 1587년 남편이 출전해있는 동안 그녀는 교회를 방문했고,결국 기독교 인으로 몰래 세례를 받습니다. 이때 가라샤(Grati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Gratia는 라틴어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같은해인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 선교와 남만 무역을 금지하는 령을 발표했고, 거기에는 다이묘가 허락없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가라샤의 남편인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자신의 가문에서 기독교도가 있는것에 화를 냈습니다. 기독교도가 된 시녀들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코를 잘라 집안에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내가 기독교도가 된것을 몰랐다는 이야기와 알고서는 강제로 개종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기전의 타마는 매우 자존심 강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지만, 기독교를 믿은후 온화하고 참을성 많은 성격이되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인 1600년 8월(음력7월) 가라샤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전투였다고 합니다. (일본사는 잘 몰라요) 세키가하라 전투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도쿠가와 군으로 우에스기 가문을 토벌하러 참전한 틈을타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 합니다. 하지만 가라샤는 인질이 되는것을 거부했으며, 스스로 죽는것을 택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기독교도였으며 자살을 할수는 없었죠. 결국 집안의 하인이 창으로 가슴을 찔러서 죽게 합니다. 그리고 하인은 주인의 시신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 저택에 폭약장치를 작동시킨후 스스로 자결합니다.
가라샤가 죽은지 몇시간후, 당시 일본에서 존경받았던 예수회 신부였던 Gnecchi - Soldo Organtino가 호소카와 가문의 저택을 방문해서 타고 남은 가라샤의 뼈를 수습해서 기독교 묘지에 안장시켰습니다.
그후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아내를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른후, 유해를 이장합니다.
호소카와 가라샤의 묘
가라샤가 죽은후,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장남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것에 화를 냈으며, 이때문에 20년이상 부자사이에 인연을 끊고 살기도 합니다.
호소카와 가라샤는 순교자로써 유럽에 알려지게 되는데, 이는 일본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유럽사람들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서양에서 가라샤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이 나왔는데, 이를테면 1698년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였던 엘레노오레 마그달레나(레오폴트 1세의 황후)를 위해 상연된 오페라는 호소카와 가라샤를 주제로 한것이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중 호소카와 가라샤(일본어 + 구글 번역기)
그림출처
위미 미디어 커먼스
'쓰고있는글들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전국시대 여성들(3) 센토인(아야히메) : 우에스기 겐신의 누나 (0) | 2011.04.06 |
---|---|
일본 전국 시대의 여성들(2)...센히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0) | 2011.03.30 |
아자이 세자매 : 막내 고우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부인) (0) | 2011.02.17 |
아자이 세자매 : 세번째 차녀 하츠 (교고쿠 타카츠구의 부인) (0) | 2011.02.16 |
아자이 세자매 : 두번째 장녀 차차 (요도도노,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어머니) (0) | 2011.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