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프랑스

루이14세와 가족들...(7)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자녀들

엘아라 2010. 12. 29. 05:43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베르사유전 다녀왔습니다....--;;;

시리즈를 다 하지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마담 드 맹트농은 안해도 될듯한데 고민입니다..ㅎㅎㅎ

 


루이14세와 가족들 ...7.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자녀들

 

몽테스팡 후작부인과 루이14세의 자녀들은 모두 일곱이었고 그중 네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자녀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두 왕실 적자들과 혼인했으며 이때문에 현재 유럽왕가의 많은 사람들이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후손들입니다.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두번째이자 성인으로 성장한 첫째는 아들인 루이 오귀스트입니다. 

 

 

 

 

루이 오귀스트 드 부르봉

멘 공작

Louis Auguste de Bourbon, Legitimé de France

 (Saint-Germain-en-Laye, 31 March 1670 – Sceaux, 14 May 1736)

 

루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것이고, 오귀스트라는 이름은 로마의 황제인 아우구스트의 이름에서 따온것입니다. 역시 누나인 루이즈와 함께 마담 드 맹트농의 보호아래서 성장했는데, 후에 그는 친어머니보다 마담 드 맹트농을 더 좋아했으며, 마담 드 맹트농 역시 친아들처럼 여겼다고 합니다. 멘 공작은 심지어 친어머니가 죽었을때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어머니는 루이 14세의 두번째 부인이자 궁정에서 제일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마담 드 맹트농이라고 여길정도였다고 합니다. 1673년에 적자로 인정받은후 멘 공작 칭호를 받습니다.

숙모이자 오를레앙 공작부인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멘 공작은 매우 싫어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친척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멘 공작이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여러 여성들과 혼담이 오갔으며, 특히 루이14세는 자신의 서자들을 정식 왕위계승자들과 결혼시키는데 열중했었죠. 더군다가 마담 드 맹트농 역시 자신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였던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자녀들의 결혼에 관여했습니다. 루이 14세가 고려한 사람들중에는 오를레앙 공작의 딸이자 조카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과 공데공의 손녀들이 있었습니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은 이에 매우 화를 냈지만, 콩데 공은 괜찮은 결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멘 공작은 그랑 콩데 공의 손녀들 중 마드무아젤 드 샤를로이라고 불렸던 루이즈 베네딕트와 결혼합니다.

멘 공작은 아버지 루이14세와 마담 드 맹트농의 총애를 받았기에 후에 루이14세의 적자들이 거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루이 14세는 심각하게 맨 공작을 왕위계승자로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조카인 오를레앙 공작의 권리를 침해하는것이었죠. 게다가 오를레앙 가문  다음 왕위계승 서열의 가문들 역시 반발을 합니다.

루이 14세는 아들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게 만들었지만, 그가 죽은후 섭정이 된 오를레앙 공작은 단독 섭정이 되었고, 멘 공작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맨 공작은 섭정을 오를레앙 공작이 아닌 루이 15세의 숙부인 스페인의 펠리페5세로 하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서 추방당하지만, 1720년 다시 궁정으로 돌아올수 있었고 그 후에는 루이 14세가 선물한 성에서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자손들이 단절된후 엄청난 재산은 동생의 후손인 팡티에브르 공작에게 돌아갑니다.

 

 

 

멘 공작부인

루이즈 베네딕테 드 부르봉

 

 

 

넷째이자 성인으로 성장한 두번째 자녀는 딸인 루이즈 프랑수아즈입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

마드무아젤 드 낭트

부르봉 공작부인, 콩데 공비

Louise Françoise de Bourbon, Légitimée de France

(1 June 1673 – 16 June 1743)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이름중 루이즈라는 이름은 대모였던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의 이름을 딴것이라고 합니다. 루이즈가 태어났을때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정식정부가 아니었고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가 정식정부였죠.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태어난해 적자로 인정받았으며 마드무아젤 드 낭트 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11살때 아버지 루이 14세에 의해서 콩데 공인 루이와 결혼합니다. 결혼후 부르봉 공작부인이나 콩데 공비로 불립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남편은 루이즈의 오빠인 멘 공작의 처남이기도 했습니다. 루이즈는 아홉자녀를 낳았습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자신의 살아남은 자매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복언니이자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의 딸이었던 마리 안이나 친동생인 프랑수아즈 마리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셋은 서로를 질투하고 지위에 대해서 경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여동생인 프랑수아즈 마리가 오를레앙 공작의 후계자와 결혼하면서 마리 안이나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지위보다 훨씬 높아졌고, 지참금도 많이 받았는데,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이를 매우 질투했다고 합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자매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큰오빠인 르 그랑 도팽과는 사이가 좋았습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남편

부르봉 공작 루이

콩데 공 루이3세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바로 밑의 여동생이자 마드무아젤 드 투르라고 불렸던 루이즈 마리 안은 어린시절 사망했습니다만, 이번에 베르사유 특별전에 이 마드무아젤 투르의 초상화가 왔습니다. ^^*

 

 

 

루이즈 마리 안 드 부르봉

마드무아젤 드 투르

Louise Marie Anne de Bourbon, Légitimée de France,

Mademoiselle de Tours

(Saint-Germaine-en-Laye, 18 November 1674 - Bourbon, 15 September 1682)

 

 

여섯째 자녀이자 성인으로 성장한 셋째는 딸인 프랑수아즈 마리입니다. 그녀는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되죠.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

마드무아젤 드 블루아

오를레앙 공작부인

Françoise Marie de Bourbon, Légitimée de France

(4 May 1677 – 1 February 1749)

 

 

프랑수아즈 마리는 몽테스팡후작부인이 정식 정부가 된후에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다른 언니 오빠들과 달리 그녀와 동생은 마담 드 맹트농이 돌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담 드 맹트농을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여겼고, 영향력을 행사했죠. 그녀는 마드무아젤 드 블루아로 불렸습니다.

프랑수아즈 마리는 어머니인 몽테스팡 후작부인을 많이 닮아서 아름다웠으며 위트있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국왕의 딸인점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했고 이때문에 오만하다는 평을 받게 됩니다.

마담 드 맹트농과 루이 14세는 이 아름다운 딸을 오를레앙 공작의 후계자인 샤르트르 공작과 결혼시키길 바랍니다.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자녀들을 싫어했던 오를레앙 공작부인은 프랑수아즈 마리를 절대 며느리로 받아들일수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결국 루이 14세는 조카와 딸을 결혼시킵니다. 아들이 결혼을 승락한것을 안 오를레앙 공작부인은 화가나서 국왕과 모든 궁정사람들 앞에서 아들의 뺨을 때리고 국왕에게 인사도 안하고 가버릴 정도였습니다.

루이 14세는 동생 부부와 조카를 달래기 위해 프랑수아즈 마리에게 엄청난 지참금을 줬는데, 이때문에 프랑수아즈 마리의 언니들인 마리 안과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막내동생을 질투했다고 합니다.

프랑수아즈 마리와 오를레앙 공작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시어머니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역시 며느리를 싫어했습니다. 오를레앙 공작은 대놓고 정부를 들였으며, 이에 화가난 루이 14세는 그를 한직으로 몰기도 했습니다.  프랑수아즈 마리는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지만, 언니들과는 달리 다른남자와 연애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죽은후, 남편이 루이15세의 섭정이 되자 프랑수아즈 마리는 루이 15세가 결혼하기전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이 됩니다.

 

 

프랑수아즈 마리의 남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루이 15세의 섭정

 

 

일곱째이자 성인으로 성장한 넷째는 루이 알렉상드르로 툴루즈 백작이 됩니다.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툴루즈 백작

Louis Alexandre de Bourbon,

comte de Toulouse (1681), duc de Penthièvre (1697),

d'Arc, de Châteauvillain and de Rambouillet (1711),

(6 June 1678 – 1 December 1737)

 

루이 알렉상드르는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막내아들로 1681년 적자로 인정받으면서 툴루즈 백작이 됩니다.그는 어려서 이미 육군 원수 지위를 받았는데, 이후 그는 군인으로 복무합니다. 루이14세가 사망한후, 형인 멘 공작과 달리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여전히 군인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는 노아이유 공작의 딸인 마리 빅투아르 드 노아이유와 결혼했습니다. 그의 손녀인 루이즈는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에갈리테와 결혼해서 후에 프랑스의 국왕이 되는 루이 필리프의 어머니가 됩니다.

 

 

마리 빅투아르 드 노아이유

툴르즈 백작부인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