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헤센

헤센 대공가의 비극..1.엘리자베트 대공녀의 죽음

엘아라 2010. 11. 21. 01:16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오랫만에 헤센 대공가 이야기를 좀 써볼려고 했는데 뭐 여러번 재탕해먹었던거라 뭘해야될지 잘 모르겠더군요..--;;;

이 가문이 비극이 많은 가문이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시리즈로 써볼까해서 말입니다.

 

시간 순서대로 하면 좋겠지만, 그냥 제맘대로 하고프다죠..--;;;;

아무리봐도 헤센대공가의 비극의 정점은 알렉산드라 황후의 죽음과 1937년 대공가족 대부분이 죽은 비행기 사고일듯해요.

 

 

 

 

헤센 대공가의 비극...1.엘리자베트 대공녀의 죽음

 

 

 

 

 

 

헤센의 엘리자베트 대공녀

Princess Elisabeth of Hesse and by Rhine

(Prinzessin Elisabeth Marie Alice Viktoria von Hessen und bei Rhein)

( 11 March 1895 – 6 November 1903)

 

 

헤센의 엘리자베트 마리 알리체 빅토리아 대공녀는 헤센의 대공이었던 에른스트 루드비히와 그의 첫번째 부인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은 증조할머니의이름에서 따온것으로, 역시 같은 사람에게서 이름을 따온 고모 엘리자베트(헤센의 엘리자베트,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처럼 엘라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아마 고모랑 안헷갈리게 리틀 엘라 정도로 불렸겠죠.)

 

 

헤센의 엘리자베트 대공녀

 

이 대공녀의 증조할머니중 한명이 바로 유명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었습니다. 사실 부모인 에른스트 루드비히와 빅토리아 멜리타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와 친손녀로 둘은 여왕의 뜻에따라 결혼한것이었죠.

엘리자베트는 이 증조할머니를 "그래니 그랜"으로 불렀으며,빅토리아 여왕 이 예쁜 증손녀를 끔찍히 아겼다고 합니다.

 

 

"그래니그랜"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있는 엘리자베트

참고로 왼쪽에 있는 소녀는 후에 스페인 왕비가 되는 에나입니다.

 

엘리자베트의 부모인 에른스트 루드비히와 빅토리아 멜리타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했지만, 둘은 서로에게 맞지 않는 상대였고 둘의 결혼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둘의 결혼이 실패했다는 소식은 전 유럽에 퍼졌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가죠. 여왕은 둘이 불행하다는 소식에 "둘의 결혼은 내가 중매한 것이다. 내 다시는 중매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왕님 취미생활 접으셨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둘이 이혼하겠다는 청에 완강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주들에게 여왕의 말은 절대적이었으며 여왕의 허락이 없는한 둘의 이혼은 불가능했죠. 빅토리아 여왕이 이혼을 반대한 이유는 오직 하나 끔찍히 사랑하던 증손녀 엘리자베트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왕족들은 이혼하느니 차라리 죽는편이 낫다고 생각할정도로 이혼하는것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부모가 이혼한 왕녀로 사는것은 엘리자베트에게 큰 짐이 될수 있다고 빅토리아 여왕은 판단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하는 증손녀에게 부모가 이혼하는 모습을 보여줄수 없다는것이었죠.

 

 

엘리자베트의 부모

헤센의 에른스트 루드비히 대공과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멜리타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죽은후 상황은 돌변합니다. 여왕이 죽은후 엘리자베트의 부모는 이혼할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에르니와의 삶을 견디지 못했던 더키는 이혼을 요구하죠. 둘의 이혼에 대부분 왕족들은 더키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녀가 먼저 이혼을 요구했기때문이었죠. 하지만 더키의 남편이었던 에르니는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절 미치게 만들고,더키를 죽어가게 만들던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것에 행복하다"라고 이야기했으며, 에르니의 누나였던 빅토리아는 "둘이 이혼하는 편이 최선이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린 엘리자베트에게 부모의 이혼은 큰 충격이었으며, 특히 자신에게 잘있으라고 키스하고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해서 무척이나 큰 상처를 안게 됩니다. 엘리자베트는 아버지 에르니를 더 따랐었는데, 에르니는 부인인 더키에게는 무관심했지만, 딸인 엘리자베트는 매우 열광적으로 사랑했었기때문이었죠. (이것은 더키에게는 큰 좌절이었죠. 스물살도 안된나이에 엄마가 된 더키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딸에게 열광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관심한 남편 곁에 있어야했으니까요. 게다가 딸을 사랑했지만, 딸은 자신보다 남편을 더 사랑했으니 말입니다)

부모가 이혼한후 엘리자베트는 반년씩 엄마 아빠와 각각 지내게 됩니다만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기에 엄마에게 가는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더키에게 가야했는데 엘리자베트가 가기 싫다고 숨었다고 합니다. 에르니가 딸을 달래면서 엄마도 널 사랑한단다..라고 했을때 엘리자베트는 "엄마는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아빠는 날 사랑하잖아요."라고 했습니다.(여기서 엄마는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아빠는 행동으로 날 사랑하는걸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각각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엘리자베트

 

 

부모가 이혼한지 2년후인 1903년 엘리자베트는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1903년 10월 헤센 대공가에서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엘리자베트의 사촌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의 결혼식이었죠. 앨리스는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결혼했으며, 이때 유럽의 많은 왕족들이 결혼식에 참석합니다. 특히 헤센대공가 사람들 전부가 이 결혼식에 참석했고, 엘리자베트는 좋아하는 러시아 사촌들과 다시 만납니다. (앨리스의 결혼식은 1차대전전 유럽의 왕족들이 대거 모인 마지막 가족행사였다고 합니다.)

앨리스의 결혼식후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딸을 데리고 짜르 가족과 함께 폴란드의 사냥터로 갑니다. 엘리자베트는 이곳에서 러시아 사촌들과 즐겁게 놀죠. 하지만 사촌들과 놀고난 다음날 엘리자베트는 가슴의 통증을 호소합니다. 목이 붓고 열이 엄청나게 높아졌죠. 러시아 황실 주치의는 처음에는 그냥 다른 황녀들처럼 잠깐 아픈것이라고 판단햇으며, 황실가족들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자 놀라서 바르샤바의 전문의를 불렀습니다만, 엘리자베트의 상태를 완화시키지 못하죠.

의사들은 황후에게 아이 엄마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충고합니다만, 처음에 황후는 이를 주저합니다. 황후는 오빠와 이혼한 더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죠. 하지만 엘리자베트의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면서 더키에게 전보를 보냅니다만, 그때는 이미 늦었죠. 더키는 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지만, 기차역에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죠.

엘리자베트의 상태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악화되었기에, 황제를 암살할려고 놔뒀던 음식을 대신먹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질정도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엘리자베트의 병이 아마 급성 장티푸스로 추정하며 단순한 장티푸스와 달리 치명적이어서 손쓸수 없었을것이라 추측한다고 합니다.

 

 

러시아 사촌들인 올가와 타니아나와 함께 있는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의 죽음은 엘리자베트의 부모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딸을 끔찍히 사랑했던 에르니의 충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딸을 위해 슐로스 볼프스가르텐에 작은 인형의 집을 만들어줄 정도였죠. 이곳은 동화속에 나올만한 작은 집으로 엘리자베트의 소꿉놀이를 위한 모든것이 갖춰진 예쁜 집이었습니다.(현재도 볼프스가르텐에 있습니다.-흑..일년에3일개방하는 슐로스 볼프스가르텐..ㅠ.ㅠ)

이런 그에게 딸의 죽음은 큰 슬픔이었고, 사랑하는 딸의 마지막 역시 동화처럼 꾸몄다고 합니다.

장례식때 검은색 대신 모든것을 흰색으로 바꾸었으며,딸의 관은 네마리의 백마가 끄는 수레에 실었고, 딸의 관주변에는 꽃으로 장식해서 딸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꾸며줬습니다. 그리고 딸의 묘는 날개를 펼친 천사가 무덤을 지켜서 보호하는 장식으로 꾸몄습니다. 에르니는 딸이 죽은지 30년 후에도 딸에 대해서 그애는 "내 삶의 햇살(suhshine)이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헤센의 엘리자베트 대공녀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사진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