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앨리스 왕자비는 이모인 엘라 대공비가 묻혀있는 예루살렘에 묻히고 싶어했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엄청나게 골치아픈일이었다고 합니다. 하여튼 엘라 대공비는 성인으로 시성되었기에 앨리스 왕자비는 바로 곁에 묻힐수는 없었죠. 하지만 교회내 다른곳에 묻힐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걸 읽고서는 문득 크리스마스도 되고 했으니 성인이 된 왕족들을 한번 찾아볼까합니다. 다는 무리고 일단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의 성인을 찾아봤죠. 아하하...
더 있을수도 있지만 제가 찾은 분은 세분입니다. 세분다 연관이 있으신분이군요...아하하하..(그런데 두분이 중세시대 분이군요..--;;중세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데....)
헝가리의 성 엘리자베트
헝가리의 엘리자베트
튀링겐의 엘리자베트
헝가리의 공주, 튀링겐의 백작부인
Saint Elisabeth of Hungary
(German: Heilige Elisabeth von Thüringen or Heilige Elisabeth von Ungarn, Hungarian: Árpád-házi Szent Erzsébet, July 7, 1207 – November 17, 1231)
헝가리 왕의 딸로 독일 중부지방의 상속인이 됩니다. 이분의 후손들이 헤센가문 사람들입니다.
헝가리의 국왕인 안드레아2세와 메라니아의 거투르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400년대에 작성된 문서에서는 그녀가 5살때 튀링겐의 루드비히4세와 약혼해서 헝가리를 떠났다고 합니다만 다른 여러 기록들은 4살때였다고 합니다. (.... 헨리2세의 어머니인 마틸다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5세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을 떠난것이 12살때던가 그랬습니다. 아마도 약혼한 신부를 데려와서 신랑측에서 교육을 시킨듯합니다...완전 민며느리제랑 비슷하군요...쿨럭.. 잘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중세시대때 약혼한것은 결혼한것과 거의 동일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4살이 되던 1221년, 그녀는 루드비히4세와 결혼했고, 그해 12살이었던 루드비히4세는 튀린겐의 란트그라프로 인정받습니다.(변경백쯤으로 해석될수 있는 이 직위는 우리가 알고있는 귀족으로 백작이라는 의미보다는 독립된 강력한 영주의 의미가 강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왕족이라는거죠.. 튀린겐은 지금의 중부 독일지방이라고 합니다.)
둘은 결혼은 행복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1222년 프란체스코회의 수사들이 튀링겐에 왔고, 10대의 엘리자베트는 청빈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회의 신념을 받아들였고 스스로도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처럼 살기 시작 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루드비히4세는 부인의 이런 행동에 화를 내지 않았고 스스로도 동참했다고 합니다. 그 역시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었죠. 이때문에 튀링겐지역에서는 루드비히4세도 성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시성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시기 엘리자베트에게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사제인 마르부르크의 콘라트로 그는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1226년 튀링겐지역에 홍수로 이재민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2세의 부름을 받고 자신의 영지에 없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이 어려운시기에 자신의 모든 영지 사람들을 위해 일을 했고, 심지어는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입고 있던 옷과 장신구까지도 벗어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살던 바르트부르크 성에 병원을 세우고 매일 아픈 사람들을 간호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고 있는 성 엘리자베트
1227년 엘리자베트의 삶은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됩니다. 엘리자베트의 남편인 루드비히4세가 이탈리아에서 사망한것이었죠.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엘리자베트는 '그가 죽었다. 그가 죽었다. 나에게는 세상이 죽은것과 같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와 루드비히4세 사이에는 한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이 있었고, 아들인 헤르만2세가 튀링겐의 란트그라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렸기에 엘리자베트의 시동생인 하인리히 라스페가 섭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녀의혼수에 대한 처분문제로 잠시 논쟁이 있은후, 엘리자베트는 성을 떠나 헤센에 있는 마르부르크로 갔습니다. 일반적인 이야기로는 엘리자베트가 시동생인 하인리히에 의해 쫓겨났다고 여겨지지만, 그때문에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고합니다.
남편이 죽은후 엘리자베트는 수녀가 되는것과 비슷한 서원을 했고, 엄격했던 콘라트 신부는 엘리자베트에게 육체적 고행을 하라고 조언을 했으며, 아이들과도 멀리 떨어져 지내라고 했다고 합니다.(속세와 인연을 끊으라는 의미인듯....) 하지만 엘리자베트의 가족들은 정치적 이유로 그녀의 수녀 서원을 감추려 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는 가족들에 의해 재혼을 강요 당하자 자신의 코를 잘라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까지 수녀 서원을 지켰다고 합니다.
재혼을 하지 않게 된후, 엘리자베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한 분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된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재를 털어 마르부르크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다고 합니다.그녀는 24살이 되던 1231년 마르부르크에서 사망했습니다.
성 엘리자베트의 장례식
엘리자베트의 아들인 헤르만2세는 어머니가 죽은후 섭정인 숙부에 의해서 물러났고, 하인리히는 조카의 뒤를 이어 튀링겐의 란트그라프가 되었다고 합니다. 헤르만2세는 어머니가 죽은 10년후 사망했는데, 몇몇 역사학자들은 어린시절 숙부에 의해 독을 먹었기때문에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큰딸인 튀링겐의 소피아는 브라반트 공작과 결혼했고 그녀의 아들인 하인리히는 후에 외할아버지의 영지중 일부였던 헤센지방을 상속받아 헤센의 란트그라프가 되었고, 헤센 가문의 조상이 됩니다.
막내딸인 거트루트는 알텐베르크의 수녀회의 수녀원장이 됩니다.
엘리자베트가 죽은 직후 그녀의 무덤과 병원주변에서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는 기적의 장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1235년 그녀의 봉사와 기적이 인정되어서 시성되었다고 합니다.
마르부르크에 있는 엘리자베트의 교회
헝가리의 성 엘리자베트는 카톨릭과 루터파,영국 성공회에서 성녀로 여겨지고 있으며 축일은 11월 17일 내지 19일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상징은 장미와 왕관,그리고 음식 바구니라고 합니다. 그녀는 병원과 간호사, 제빵업자, 신부들, 백작부인과 죽어가는 아이들과 망명자들과 집없는 이들과 레이스 수공업자와 과부들의 수호성녀라고 합니다.(수호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은거 보면 중요한 성인이신듯합니다..아하하하..)
포르투갈의 성 엘리자베트
포르투갈의 엘리자베트, 아라곤의 엘리자베트
아라곤의 공주, 포르투갈의 왕비
Saint Elizabeth of Portugal
Elizabeth of Aragon (1271–4 July 1336)
(Elisabet in Catalan, Isabel in both Portuguese and Spanish)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는 이사벨로 쓰이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스페인을 성립한 카스틸랴의 이사벨 여왕은 라틴어로는 엘리자베트라고 왕명을 쓴다고 하죠.
앞의 엘리자베트의 종질녀가 됩니다.(여동생의 손녀)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는 성 엘리자베트는 아라곤의 국왕이었던 페드로3세와 시칠리의 콘스탄티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페드로3세는 대왕이라는 칭호로 불린 사람으로 중세시대 아라곤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디니스 국왕과 결혼하기고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이사벨은 어린시절부터 매우 신앙심이 깊었고, 다른이들을 돕는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후에도 가난하고 아픈이들을 위해서 헌신했으며 이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주변으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이들과 문제를 발생하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한 사악한 귀족이 국왕의 질투심을 이용해서 이사벨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고 합니다. 국왕은 왕비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고 믿게 되었고 증거를 발견하면 잔인하게 죽이기로 결심하죠. 하지만 그녀에게 일어난 이상한 일들을 통해서 결국 왕비가 무고하다는것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디니스 국왕 역시 부인 처럼 가난한 이들을 돕고 기금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이사벨과 디니스 국왕 사이에는 두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인 알폰소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포르투갈의 왕이 되었고, 딸인 콘스탄사는 카스틸랴의 국왕 페르디난드4세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디니스는 적자인 알폰소보다 사생아 아들을 더 좋아했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까지 했기에 이사벨의 아들인 알폰소는 아버지를 상대로 내전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1323년에 일어난 전쟁에서 이사벨은 남편과 아들사이에 중재를 맡아서 화해하게 했고 그때문에 'peacemaker'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1325년 남편이 사망하고 아들이 즉위하자, 이사벨는 1314년에 자신이 세운 수녀원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청빈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 회의 규칙을 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1336년 알폰소 4세는 딸인 마리아를 푸대접하고 이혼한 사위이자 조카인 카스틸랴의 알폰소 11세와 전쟁을 벌이려고 하자 중재를 맡았다고 합니다. 두 군대가 대치한곳으로 급히 가서 아들과 손주 사위를 말렸다고 합니다. 두 나라간의 전쟁은 중재했지만, 이사벨은 이해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의 성 엘리자베트(이사벨)
저기보면 역시 기적의 장미가 보입니다.
하지만 기적의 장미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첫번째 성 엘리자베트라고 합니다.
이사벨이 죽은 직후 기적이 계속 일어났고, 여기에는 기적의 장미역시 포함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1625년 이사벨은 성녀로 시성받았다고 합니다. 축일은 7월4일이라고 합니다.
the Holy New Martyr 성 옐리자베타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
헤센의 엘리자베트 대공녀
HIH The Grand Duchess Elizabeth Feodorovna of Russia
(Elizabeth Feodorovna Romanova Russian: Елизавета Фë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1 November 1864 – 18 July 1918)
앞에서말한것처럼 헝가리의 성 엘리자베트의 후손입니다.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러시아 정교회 성녀입니다.
앞쪽 포스트에서 이미 많이 다뤘기에 간단하게 적을까 합니다.
엘라라는 애칭의 헤센의 엘리자베트 대공녀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헤센의 대공인 루드비히4세와 그의 부인인 앨리스 대공비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그녀에게 청혼하는 왕족들이 많았고, 그중에서는 독일의 황제가 되는 빌헤름2세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름답고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는 역시 자신과 같이 신앙심이 깊은 오촌인 러시아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합니다. 러시아 황실에서 엘라는 매우 상냥하며 아름다운 사람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세르게이 대공과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세르게이 대공은 보수주의자였으며,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엘라는 자신의 아이를 갖기 못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폭탄테러로 암살당한후, 입양한 조카들인 드미트리 대공과 마리야 여대공을 키우면서 가난한 이들과 상의군인을 돕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리야 여대공이 시집가고, 드미트리 대공이 군에 입대하자 엘라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고, 모든 재산을 다른이들에게 나누어주고는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집을 수녀원으로 만들고 스스로 수녀가 됩니다. 그리고 자선사업에 전념하죠.
라스푸틴문제로 동생 알렉산드라 황후와도 멀어졌던 그녀는 결국 러시아 혁명때 다른 황족들과 함께 살해당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시신은 언니 빅토리아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죠.
그후 1981년에는 해외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시성되었고, 1992년에는 국내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서 시성되었습니다.
수녀복장의 엘라 대공비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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