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The last Princess...1.'It's a fine child'

엘아라 2016. 4. 24. 12:17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4월달에는 어쩔수 없이 블로그에 글을 쓸수가 없었답니다.

사실 글을 쓰는 자체는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은 아닙니다.

진짜 날잡아서 쓰면 한달치를 보통 일주일정도 안에 다 쓰거든요.

문제는 그 일주일을 쓰기 위해서 한달 내내 자료를 찾고 글을 읽어야한다는 것이라죠 ㅠ.ㅎ


아실분은 아시겠지만 부끄럽게도 제가 책을 내기로 했습니다.

자신도 없고 누가 사 주실지도 걱정이긴한데 출판사에서는 그래도 사줄 분들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계약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일단 마감이 4월이라 3,4월에 정신이 좀 없었습니다.

저도 책은 처음 내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뭐 일단 열심히 썼고 앞으로도 써야할듯합니다.

그래도 일단 기본 내용이 있으니까 거기에 좀더 고치면 되는 부분은 덜 부담스러워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하하..-0-;;;


그래서 아쉬워하는 분들을 위해 예전에 올렸던 글 하나를 다시 올립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하는 책들이 몇개 있습니다. 

사실 앨리스 왕자비 책을 번역하면서 필받아서 몇개 번역하고 있는데 뭐랄까 번역은 힘들더라구요.

앨리스 왕자비 빼고는 완결한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ㅠ.ㅠ

어쨌든 그중 하나인 베아트리스 공주 전기 번역 부분 일부를 다시 올립니다.


이 글로 남은 한주는 적당히 이해해주세요. ^^



 

가지고 다녀서 너덜너덜 해진 제책-0-;;;

....저책 하드커버인데 산지 1년도 안되어서 앞쪽에 이미 갈라져서 열받아서 저 출판사에 항의할뻔했습니다.

(영어의 압박이라....) 

 

1.이글의 1차저작권은 저자와 그 출판사에 있습니다.

2.이글은 아마존 미리보기가 가능한곳까지만 번역한것입니다.

 

Chapter1. 'It's  a fine child"

-앨버트공이 베아트리스가 태어났을때 한 말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되는일이었고, 의학적 권고는 결코 설득력이 없었다. 그 전해인 1856년 2월 제임스 클락경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초 여왕의 주치의로 임명된-은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쉽지않다고 느꼈다. 여왕의 의중에 관해서는, 비록 여왕께서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지않으셨지만.... 여왕께서 위험에 빠질수도있는 시간이 다가올것이다.'
1857년 부활절 월요일이었다. 여왕은 알버트공과 결혼한지 18년이 지나고 있었다. 여왕은 17살에서 네살까지의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 여덟명을 낳았다.  6주전 여왕의 38번째 생일이 지났다. 이것은 그녀의 할아버지였던 조지 3세가 자신의 살아남은 일곱아들중 한명의 품안에 쓰러진후 '나는 미쳐가고 있기에 신께 나의 죽음을 간구한다'라고 외쳤던 나이보다 12살이 어릴뿐이었다. 
여왕은 지극히 감성적이고 매우 격정적인 성격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또한 여덞아이를 임신했을때와 아이를 낳았을때 매우 깊은 불행한 느낌에 빠져들었고 안정을 취하지 못했다. 후에 한 결혼한 딸에게 많은 임신의 결과는 계승자를 빨리 얻는것이라고 말했다.'너무나 지쳤으며 끔찍해 했다.' 제임스 클락경은 알버트공에게 여왕의 정신적 건강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서 알렸다. '여왕께서 또 아이를 가지신다면 그러한 것들에 빠져들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고 계십니다.'
제임스경의 주장은 신빙성이 있는것이었다. 알버트공에게서는 그것이 빅토리아 여왕의 하노버가 가계로부터 물려받은 망령이었고 빅토리아의 선조들과 친척들은 모두들 광기나 상태가 않좋았으며 매우 광범위해 보이기조차했다. 제임스경이 자신의 걱정을 표현한지 14개월이 지난후이자 여왕의 주치의가 추정했던 예정일이 14일이 지난 4월 13일 여왕은 아홉번째이자 마지막아이를 낳고있었다.

 

 

 

1854년의 여왕과 앨버트공

 결혼 15주년이던가 기념으로 결혼식 재연한것입니다


버킹엄궁에 있는 산실에서, 여왕은 앞의 여덟아이와 마찬가지고  우울해 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기운을 빼고 있었다. 당시 여왕의 상태는 마지막 임신에 대해 불행해하고 있었다. 11월에 여왕의 말썽많은 이부오빠인 라이닝겐의 카를이 뇌졸증으로 사망했고, 이에 여왕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비탄에 빠져들었다. 또 여왕의 임신한 상태 때문에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된것도 습관적인 짜증을 일으켰다. 이번경우에는 12월에 윈저에서 스케이트를 타면서 알버트공과 함께 '얼음위에서 돋보이는것'을 할수 없는것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여왕은 알버트공에게 배가 불러오는 자신의 신체적 상황이 자신에게 깊은 우울함을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한때 외삼촌인 벨기에의 레오폴1세에게 강하게 언급했던  'mamma d'une nombreuse famille'(대가족의 어머니) 가 되는것에 대한 여왕의 확신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여왕은 십칠년전 자신의 첫번째 아이인 프린세스 로열을 낳을때 느꼈던 '매우 힘있고 활기있는'느낌을 느낄수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여왕은 자신의 침대옆에 있는 존재들에게서 편안함을 얻었다. 여왕의 곁에는 여왕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편과 산부인과 의사인 닥터 찰스 로콕과 산파인 릴리부인이 있었다. 릴리부인은 여왕이 아이를 낳을때마다 매번 왔었다. 방 근처에는 자신의 불안을 이야기했었던 제임스 클락경이 도움을 주기 위해 닥터 로버트 퍼거슨과 함께 있었다. 당연히 궁정관보에는 이 두명은  이번 출산에서 닥터 찰스 로콕의 조력자로 기재되었다. 챈슬러경,크랜워스경, 수상,팔머스톤경과 런던의 주교와 함께 왕실 식솔들 역시 같이 있었다. 영어와 독일어로 예배가 진행되었다. 또 프로이센 왕태자의 주치의인 닥터 베그너도 함께있었다. 다음해 1월 25일 왕태자는 여왕의 큰딸과 결혼하게 된다.(저자가 아무래도 잘못안듯하네요..당시 프리츠는 왕태자가 아니라...그냥 왕자였는데 말입니다. 뒤에 프리츠의 어머니인 아우구스타는 왕자비로 써놓고는 여전히 프리츠를 왕태자라고 쓰더라구요.) 이 커플에게서 후계자가 태어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비록 독일의 안과의사와 외과 의사들조차도 우리의 의사들보다 더 뛰어나지만, 출산과 부인과 질병에 대해서는 영국이 세계 제일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소. 영국의사들이 더 숙련되어있고 더욱더 섬세하오.' 여왕은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프린세스 로열의 미래의 안정과 보호를 위해 닥터 베그너는 반드시 참관해야했고, 영국에서 행해졌던 모든것들을 기록해야했다.

 

 

남편이 살아있을때의 빅토리아 여왕 


이번 출산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출산이 매우 더뎠다" 존 스노우 박사는 그의 진료기록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역시 어느정도 선구적인 방법의 출산이었다. 스노우는 때때로 산부인과의사로 활동했던 약사(GP)였다. 그는 특별히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클로로포름 사용방법을 발견했고, 이것은 매우 유행했다. 그는 영국에서 마취제를 사용한 첫번째 사례가 나오기 일년전에 이미 '외과적 수술에서 에탄올의 증기흡입에 대해'를 출간하므로써, 마취술에 대해서 선구자가 되었다. 1853년 빅토리아 여왕의 시녀중 하나가 마취한후 이를 손쉽게 뽑은지 석달후에 스노우는 빅토리아 여왕이 레오폴드 왕자를 낳을때 클로로포름을 사용했다. 이 출산은 '정확히 오십삼분이 걸렸고' 여왕의 설명에 의하면 ' 그 출산은 크로로포름에 축복받았다.  ...사용후 순조로웠고,조용하며,즐거웠다.' 스노우가 만족스럽게 기록한것과 같이 '여왕께서는 유쾌하고 건강해보이셨다. 또 스스로 클로로포름의 효과에 매우 만족스럽다는 의사를 밝히셨다.' 너무나도 만족스러웠기에, 사실상, 여왕은 자신의 마지막 출산에 이것을 빼놓는것은 고려하지 않을정도였다.
스노우의 의료행위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것이었다. 1853년에 그의 클로로포름 사용에 대해서 의학저널인 the Lancet에 다음과 같은 기사에 의해 거의 반대당했다. "...지난 출산 동안 폐하께서는 클로로포름의 영향력 아래에 계셨다. 환자가 즉사한 수많은 사례에서 클로로포름이 원인이 되었음이 의심할 나위여지 없다.... 정상적인 출산에서 클로로포름 사용에 대한 판단을 내릴만한 사례는 한것도 없다.'  의학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대중들 역시 여왕의 안전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여자가 고통없이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서 종교적 차원에서 옳지 않다고 비난했다. 산실에서 스노우의 존재는 이 잘나가는 의사에게 명예와 고통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레오폴드 왕자의 탄생동안, 닥터 로콕은 클로로포름 사용에 대해 불평을 했다. 클로로포름은 고통을 경감시키는 효과때문에 진통간격을 길게 늘어뜨리고 출산을 지연시킨다는것이었다. 여왕의 열성적 지지와 알버트공의 전적인 찬성때문에, 로콕의 걱정은 조금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스노우에게 더 걱정스럽게도 그가 왕궁으로 소환되기 정확히 한주전 그는 처음으로 마취환자가 사망하는 경험을 했었다.

 

File:John Snow.jpg

존 스노우


다행스럽게도, 여왕과 예정일이 두주나 지난 여왕의 아이는 죽지 않았다. 월요일 오후 일찍 친숙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진전없이 저녁까지 진통이 계속되었다. 의사들인 로콕과 스노우는 아이가 나올 준비가 끝났던 다음날 새벽 두시까지 있었다. 출산 초기에 여왕의 진통은 상당히 진행되었지만 그때까지도 아이가 나올기미는 없었다. 여왕의 고통은 매우 심했고, 여왕곁에 있던 알버트공은 첫번째도움으로 '약 9시와 10시 사이에 아주 약간의 클로로포름이 묻은 손수건'을 여왕에게 주었다. 같은 시간에 닥터 로콕은 레오폴드 왕자가 태어날때 그랬던것처럼 분말로된 ergot(맥각)과 eager(해각)을 아이가 잘 나오게 하기 위해 처방했다. 그가 자정에 두번째로 같은 처방을 했을때 더 효과적이었다. 여왕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스노우는 그의 일상적 처방을 주저했고, 여왕이 출산 두번째 단계에 접어든것을 확신할때까지 클로로포름 사용을 자제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손수건을 꼬깔모양으로 접었고 거기다가 10미님(1minim=1/60dram.1dram=0.0037리터)의 클로로포름을 부어서, 수축이 진행될때마다 여왕의 얼굴에 손수건의 꼬깔 위쪽을 가져다 대었다. 이 'open-drop'방식의 마취법은 비록 위험할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긴했지만, 스노우가 자신의 경력 대부분에서 사용한 방법이었다.(하지만 여왕의 경우에는 4년전 이미 이 방법을 사용했었고, 이것은 명백히 여왕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에서 행한것이었다.)
여왕은 매우 지쳤다. 여왕은 잠을 자지 못했다. 첫진통이 시작된후 거의 만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여왕의 임신 마지막주에 여왕은 쉬지 못했다. 정치적 우려가 급박했었음에도, 여왕은 제임스 클락경을 통해 수상에게 내각을 구성할만한 상태가 아니라는것을 알렸다. 동시에, 웨일즈공인 장남 버티의 왕위계승자로써의 부족한점은 여왕의 분노를 점점 크게 만들었다. 여왕은 쉬지않고 알버트공에 의해서 침대와 소파사이를 옮겨다녔고, 알버트공이 공무로 자리를 비울때면, 락우드라는 하인의 도움을 받아서 옮겨다녔다. 여왕은 고통이 가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클로로포름을 더 처방해달라고 요구했다.
여왕의 불평은 아마도 정당한것이었을것이다. 스노우로부터 여왕이 처방받은 클로로포름은 레오폴드를 낳는동안 처방받았던 세기의 2/3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스노우는 여왕의 출산 전주에 있었던 경험때문에 클로로포름의 양을 더 주지 않았다.  수축 사이에 여왕은 정신이 혼미해졌고, 잠깐씩 기절했다. 한시 경이 되었을때, 드디어 닥터 로콕은 아기의 머리가 나오는것을 보았고 여왕에게 '힘을 주라고'이야기했다. 하지만 여왕은 할수없다고 대답했다. 스노우는 서너번의 수축에 한번씩 클로로포름을 썼고, 여왕은 다시 힘을 냈다. '그리고 여왕께서는 머리를 밀어내기위해 노력하셨고, 머리가 나오는동안 적은양은 클로로포름만이 주어졌다.'닥터 스노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기가 다 나오기 전에 몇분간의 간격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아기가 울었다. 10분후에 태반이 나왔다.' 이때가 1시 45분이었다. 알버트공은 첫진통이 시작된 다음날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2주가 지난후, 빅토리아여왕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나는 내 사랑하는 알버트가 '건강한 딸이야'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을때 그동안 겪었던 내 모든 고통을 잊었고, 크나큰 보상을 받았다. ' 여왕은 다섯째이자 막내인 딸을 얻었다. 여왕의 평생동안 이 아이는 빅토리아와 알버트의 '아기(Baby)'로 남아있었던 막내였고, 여왕을 위한 마지막 아이인 'the last princess'였다.

 

 

빅토리아여왕과 앨버트 공의 Baby

베아트리스 공주

..여왕은 자신의 막내딸을 baby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4월 15일 알버트공은 여왕곁에서 프린세스로열의 시어머니가 될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타 왕자비에게 편지를 쓴다. '아이와 어머니 모두가 건강합니다. 아기는 공연전의 훌륭한 프리마돈나처럼 자신의 목청을 연습중입니다. 그리고 목소리도 좋습니다. 빅토리아는 죄수처럼 매시간시간을 기록하고 있답니다. 아이들은 누이동생의 이름을 고민중이며, 어떤 이름이 가장 좋을지 논의중입니다.'
스노우는 공주를 낳은후 여왕의 즉각적 신체적 반응과 자신의 마취 처방을 간단하게 기록했다. ' 여왕의 회복은 매우 순조로웠다.' 여왕자신은 특유의 더 단호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왕은 임신중 고통받았던 아홉달동안에 대해 고통의 정도를 설명하면서 매우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나는 내가 전에 항상그랬던것보다 훨씬더 건강하고 활기차다고 느낀다.' 여왕은 아이낳는것을 싫어한다는것을 그만두려는 노력을 더 하지 않았고, 여왕은 자신 스스로가 잠시 기뻐하는척했다.
하지만 몇가지 문제가 의사들이 괜찮다는 진단을 내릴수 없게 햇고, 여왕은 마치'죄수처럼'침대에 누워서 회복기간을 보내야했다. 반면 알버트공은 여왕은 사적으로, 공적으로 돕는 자신의 정상적 업무와 위의 여덟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타 왕자비에게 편지를 쓴 같은날, 알버트공은 여왕의 80대 고모인 글로스터 공작부인인 메리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공작부인은 알버트공이 전에 보내준 편안한 소파에 대해서 감사의 말과 '사랑하는 빅토리아가 건강해져서 신께[감사드린다]'라고 적고있다. 조지3세의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딸인 공작부인은 서서히 죽음을 향해가고 있었다. 여왕이 버킹엄궁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동안, 알버트공과 아이들 몇명은 글로스터 공작부인을 만나러갔다. '부군과 왕실가족의 어린 아이들은 매일 밖으로 나가신다.'Illustrated Londeon News에서 다음과 같이 기사를 적고 있다. '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저명하고 존경할만한 공주의 안부를 물으시기위해 주로 글로스터 하우스를 방문하신다.' 이것은 공주가 죽기전 거의 두주동안 계속되었다. 결국은 여왕자신이 둘째딸인 앨리스공주를 데리고 하이드 파크의 서쪽에 있는 큰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누이의 이름을 짓기위해 의논중이던 왕실 아이들은 아기의 이름중 하나에 이 늙은 공주의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

 

 

베아트리스 공주

....베아트리스 사진중 맘에 드는 사진중 하나

...나이들면서 점점 엄마 닮아가십니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