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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204) 그리스의 마리아 :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부인 (세번째)
그리스의 마리아
러시아의 마리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
Princess Maria of Greece and Denmark
Μαρία, Мария Георгиевна;
(3 March [O.S. 20 February] 1876 – 14 December 1940)
마리아와 형제 자매들은 모두 그리스에서 태어났으며 정교회를 믿었고 그리스어를 쓰면서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에게 스스로가 그리스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며 자신의 조국인 그리스에 대해서 애착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기오스 1세가 유언장에서 아들 콘스탄티노스에게 말했던것처럼 그리스인들에게 이들은 외국인이었으며 또 절대 이를 잊지 않았었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은 마리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스에서 그리스인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게 만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어린시절 자신에게 그리스 혈통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슬퍼서 울었으며 나이가 들어서 자신의 집은 아테네라고 늘 생각했었고 훗날 회고록에서 스스로를 "진정한 그리스의 자녀"라고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터키)와 갈등을 빚고 있었으며 이것은 수시로 무력충돌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1897년 크레타 섬이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나 그리스로 돌아가고 싶어하면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리스는 이를 지원하려했습니다. 결국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다시 한번 발생합니다. 이때 마리아는 어머니와 함께 야전병원에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1889년 언니 알렉산드라가 결혼한 뒤 마리아는 아버지가 가장 예뻐하는 자녀로 남았으며 아버지의 개인 비서 역할을 맡게 됩니다. 사실 아버지의 개인 비서 역할은 어머니인 올가 왕비가 담당했었는데 올가 왕비의 시력이 떨어지면서 마리아가 어머니 대신 아버지를 도왔고 자주 아버지와 함께 다녔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문에 1898년 게오르기오스 1세에 대한 암살 시도 당시 마리아 역시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누군가 자신들을 향해 총을 쏘자 딸을 보호하려했었는데 시종과 말 두마리가 다치진했지만 마리아와 게오르기오스 1세는 무사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를 사랑했고 그리스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대 수많은 공주들은 대부분 외국 왕가 사람들과 결혼해야했습니다. 마리아의 가문도 귀천상혼에 대해서 엄격히 따지던 가문이었으며 이것은 마리아가 그리스에서 결혼할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올가 왕비는 자신의 고향인 러시아를 너무나도 사랑했으며 마리아 역시 큰딸 알렉산드라처럼 러시아로 시집가길 바랬습니다. 그리고 올가 왕비의 마음에 드는 사윗감이 나타납니다. 바로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으로 올가 왕비의 첫번째 사위인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처럼 올가 왕비의 사촌이었습니다.
사실 마리아와 게오르기 대공는 서로에 대해서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1894년 사촌이었던 크세니아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과 게오르기 대공의 동생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동안 게오르기 대공을 만났었고 그에게 어느정도 호감을 느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게오르기 대공이 마리아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후 1895년 마리아는 어머니를 따라 러시아로 갔으며 궁정 무도회에서 게오르기 대공을 다시 만납니다. 이때는 게오르기 대공은 다시 만난 마리아에게 반해버렸지만, 반면 마리아가 게오르기 대공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게오르기 대공이 나이가 너무 많고 (게오르기 대공은 어머니 올가 왕비의 사촌으로 마리아보다 13살 많습니다. ) 지겹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딸을 러시아로 시집보내고 싶어했던 어머니 올가 왕비가 매우 실망스러워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1896년 봄 마리아는 게오르기 대공의 청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마 마리아는 어머니의 압력등으로 인해서 그냥 결혼하기로 결정해버렸던듯합니다. 그리고 4월에 공식 약혼이 발표되었고 8월에 결혼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 약혼에 대해서 그리 신경쓰지 않았던것같습니다. 훗날 그녀의 회고록에서 마리아는 올림픽기간에 그리스를 방문한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드라가 마신과 결혼했던 그 사람)이 자신에게 청혼했지만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오르기 대공과 약혼한 시점 역시 이때쯤이었는데 이때 약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결혼은 계속 연기되다가 10월에는 약혼이 취소되기까지합니다.
게오르기 대공은 마리아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었으며 계속해서 마리아에게 청혼을 합니다만 마리아는 늘 그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흐르게 됩니다. 게오르기 대공은 계속된 마리아의 거절에 실망스러워했는데 니콜라이 2세는 게오르기 대공에게 한번만 더 청혼해보고 거절한다면 그만 포기하라는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0년 봄 게오르기 대공은 마지막으로 마리아에게 청혼을 하러 왔습니다. 이미 20대 중반이었던 마리아는 당대 왕가의 기준으로 볼때 이미 결혼하기 늦은 나이였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의 가족들은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리아의 어머니인 올가는 딸이 러시아로 시집가는 것에 적극적이었기에 마리아에게 더욱더 압박을 가했을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는 이번에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올가 왕비는 이미 딸이 후에 약혼에 대해서 마음을 바꿨던 것을 기억했고 딸이 결혼을 승낙하자마자 결혼준비를 시작해서 1900년 5월 12일 코르푸 섬에서 24살의 마리아와 37살의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결혼식을 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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