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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11)정치적 상황 : 스웨덴의 왕위계승자

엘아라 2022. 1. 1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드디어 스웨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만 후훗...여긴 앞에서 많이 안했던 부분이라서 새로운 마음으로 글을 써야하네요. 사실 이 스웨덴의 자유주의시기가 정치적으로 엄청나게 복잡해서 읽다가 맨날 때려치우고 대충 적당히 썼거든요.(게다가 그눔의 모자당들..ㅠ.ㅠ 아니 두개를 어떻게 다르게 번역하냐고요..ㅠ.ㅠ 스웨덴어로 그대로 쓰는 편이 나을듯하지만 그게 어떻게 명사로 써야하는지 애매하고..ㅠ.ㅠ)

심지어 한국어로 된 북유럽사를 읽었는데도 이 시기는 머리가 아프더라구요.ㅠ.ㅠ

 

...이참에 새로운 마음으로 봐야할듯합니다 ㅠ.ㅠ

 

[새해특집]통치자이길 원했던 왕비 :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11) 정치적 상황  : 스웨덴의 왕위계승자

 

루이제 울리케와 혼담이 오가게 된 인물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였던 아돌프 프레드릭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돌프 프레드릭은  스웨덴 국왕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돌프 프레드릭이 왕위계승자가 된것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 외교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돌프 프리드리히, 스웨덴의 아돌프 프레드릭

 

루이제 울리케의 아버지가 죽은 1740년에는 사실 유럽의 여러 중요한 통치자들이 사망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황제 카를 6세였는데, 그가 죽고 나서 결국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일어났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루이제 울리케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왜냐면 루이제 울리케의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오스트리아로부터 슐레지엔 지방을 뺏기때문입니다. 이것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평생의 원한으로 삼았으며 이전에 동맹이었던 프로이센과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게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스웨덴 역시 이 전쟁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복잡하고 오래된 스웨덴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몰비츠 전투, 슐레지엔을 두고 1741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치른 전투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이후 유럽의 강국으로 떠올랐었습니다. 하지만 18세기가 되면서 스웨덴의 힘을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이전에 한수 아래로 봤었던 러시아가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게 됩니다. 특히 대북방전쟁에서의 상황은 스웨덴에 큰 상처가 되었으며 스웨덴에서는 옛 영광을 재현하길 바랬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전통적 숙적이었던 프랑스에서는 친 오스트리아 정책을 폈던 러시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스웨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결국 여러가지 외교적 문제가 겹쳐지게 되면서 스웨덴은 러시아와 갈등관계가 더 깊어지게 됩니다.  특히 1740년 10월 안나 여제가 죽고 석달된 이반 6세가 즉위하면서 러시아 내의 권력투쟁이 시작되면서 스웨덴은 러시아를 공격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1741년 8월 스웨덴은 러시아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웨덴은 이 전쟁에 준비가 부족했을뿐만 아니라 1741년 12월 러시아 내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서 표트르 대제의 딸인 옐리자베타 여제가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여제가 제위에 오른뒤 러시아와 스웨덴의 전쟁 상황은 스웨덴이 러시아에 패배를 했으며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뺏긴채 1743년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1742년경 스웨덴-러시아간의 전투가 일어난 지역

 

1742년 이미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게 되면서 스웨덴 내에서 프랑스 쪽을 지지하던 정당Hattpartiet (hattarna)의 힘이 약해지고 대신 러시아쪽을 지지하는 정당Mösspartiet ( mössorna)이 부각됩니다. 이들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러시아쪽이 지지하는 왕위계승자를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문제는 다시 복잡해졌었습니다. 1741년 울리카 엘레오노라 왕비가 후손 없이 사망하고 국왕 프레드릭 1세만 남게 되면서 왕위계승자에 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프레드릭은 스웨덴의 국왕이긴 했지만 스웨덴 왕가와 혈연적 관계는 없는 인물로 아내인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의 양위를 받아서 스웨덴의 왕위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설령 프레드릭 1세가 재혼해서 자녀를 얻는다고 해도 스웨덴 내에서 왕위계승자로 인정하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웨덴 내에서는 프레드릭의 후계자가 될 인물을 찾게 되는데 딱 맞는 인물이 한명있었습니다. 바로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조카손자였던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카를 페테르 울리히였습니다. 국왕 칼 11세의 증손자로 스웨덴 왕가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혈연적으로도 적당한 인물이었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이자 옐리자베타 여제의 조카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스웨덴에서 당연히 홀슈타인-고토로프의 페테르를 왕위계승자로 선출할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옐리자베타 여제는 이미 자신의 조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었습니다. 이전에 러시아는 후계자 문제로 내부적으로 매우 혼란해졌었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지정하지 못하고 죽은뒤부터 옐리자베타 여제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후계자 문제를 두고 러시아 내부에서 갈등이 심했던 것입니다.  평생 정식 결혼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옐리자베타 여제는 당연히 자신의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조카를 자신의 정식 후계자로 삼으면서 이런 후계자에 대한 문제를 원천적으로 막으려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여제는 조카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가 되는 것을 허락할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옐리자베타 여제가 스웨덴 왕위계승문제에 완전히 손을 땐것은 아니었습니다.

 

옐리자베타 여제

 

여제는 조카의 오촌아저씨였던 홀슈타인-고토로프-오이틴의 아돌프 프리드리히를 스웨덴 왕위계승자로 추천합니다. 여제가 그를 왕위계승자로 추천한 이유는 여러가지였는데 일단 여제는 스웨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싶어했으며 또한 조카의 가문에서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길 바랬을 것입니다. 게다가 여제는 한때 아돌프 프리드리히의 형과 약혼했었지만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결혼하지 못했었기도 합니다. 물론 여제는 그냥 그를 추천한것이 아니라 그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가 된다면 점령했던 핀란드 지역을 다시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스웨덴에서는 이런 약속을 받고 그를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선출하게 됩니다. 사실 스웨덴에서는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 시절부터 국왕을 선출할 권리를 의회가 가지게 됩니다. 이때문에 팔츠-츠바이브뤽켄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왕위계승자로 선출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아돌프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바로 루이제 울리케의 혼담 대상이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