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뒷파트는 정치파트라 진짜 안 읽힙니다.. .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107) 요크의 대주교 제프리 : 헨리 2세의 아들(두번째)
요크의 대주교 제프리
Geoffrey
(c. 1152 – 12 December 1212),
sometimes called Geoffrey Plantagenet, fitzPlantagenet, or fitzRoy,
제프리의 이복동생이자 헨리 2세의 후계자였던 리처드는 제프리의 요크 대주교 지위를 인정해줍니다. 이것은 여러가지 복합적 이유때문이었는데 아마도 잉글랜드 왕위계승문제 때문이었을듯합니다. 리처드는 스스로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려는 생각은 없었으며, 헨리 2세가 죽기 전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햇었습니다. 이때문에 아버지 곁에서 오래도록 잉글랜드 통치에 관여한 제프리를 위협적 존재로 느꼈을 것입니다. 이에 리처드는 제프리의 요크 대주교 지위를 인정해주는 대신 그가 잉글랜드 국왕의 자리를 넘보는 것을 막으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리처드의 어머니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제프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요크 대주교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상황은 제프리가 요크 대주교로써 활동하는데 제약과 어려움을 따르게 합니다.
리처드 1세
1191년 제프리는 드디어 요크 대주교로써 잉글랜드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이는 교황은 물론 리처드와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승인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만,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문제가 생깁니다. 당시 리처드를 대신해서 잉글랜드를 통치하던 인물은 윌리엄 롱샴(William Longchamp)이었습니다. 그는 제프리가 자신의 정적이 될 인물이라고 여겼으며 이에 사람을 보내서 요크로 가는 제프리를 도버에서 투옥하게 됩니다. 심지어 제프리는 도버의 성역권으로 피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프리를 강제로 끌어내는 일을 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사건이었는데, 롱샴은 제프리가 반역죄를 저질럿다고 주장했지만, 교황의 인정을 받은 대주교를 성역권에서 끌어내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이전 헨리 2세 시대의 토마스 베켓의 살해를 연상시키는 일이었기에 결국 롱샴은 제프리를 풀어줄수 밖에 없었으며 제프리는 무사히 요크로 가서 요크의 대주교가 됩니다.
베켓과 헨리 2세
요크 대주교로써 제프리는 잉글랜드 내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사실상 잉글랜드 내 최고의 성직지위는 켄터베리 대주교였는데, 제프리는 요크 대주교의 지위가 켄터베리 대주교의 지위에 못지 않다고 여겼으며 이를 과시하는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이것은 곧 요크 대주교와 켄터베리 대주교 사이의 불화를 야기시기케 되죠.
제프리는 여러 적들에게 둘러쌓이게 됩니다. 요크 대주교로써 그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던 몇몇 사람들이 그를 적대한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리처드 1세의 신하들중에 그를 적대하는 인물이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제프리가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문에 그는 영지를 뺏기기도 하고 다시 돌려받기도 하는 등의 상황을 맞이합니다.
제프리는 자신의 교구에서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반대 세력에 대한 교황의 확답을 얻기 위해 로마로 가려합니다만 이 상황에서도 그는 국왕과 그 측근들과 마찰을 빚게 됩니다. 어쨌든 제프리는 로마로 가게 됩니다만 대신 돌아오는 길이 순탄하지 않게 됩니다. 리처드는 제프리가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제프리의 교구에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에 대한 압력을 행사랍니다. 물론 제프리는 이에 대해서 거부했었습니다. 결국 이런 갈등은 교황의 중재로 해결되었으며 제프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리처드가 사망한뒤 존이 즉위했을때 처음에 제프리와 존의 사이는 평화로운듯했습니다. 하지만 곧 세금문제로 둘은 다시 불화하는데 존이 요크 대주교의 영지에 대한 세금을 거두는 것을 제프리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존과 제프리 사이를 완전히 벌어지게 만드는데, 결국 제프리는 프랑스로 망명해야했습니다.
그리고 1212년 제프리는 프랑스에서 사망했습니다.
존 왕
제프리는 헨리 2세의 장남이었지만 사생아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소외당할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지위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햇으며 부와 명예를 추구했었습니다. 그는 매우 야망이 컸던 인물이라고 여겨졌으며 심지어 잉글랜드 국왕의 자리도 넘봤던 인물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상황은 그가 아버지인 헨리 2세 곁을 죽을때까지 지켰으며 잉글랜드를 통치하는데도 관여했었던것으로 추정할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때문에 리처드나 리처드의 측근들이 제프리에 대해 과도할정도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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