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중세시대는 진짜 그림이 잘 없습니다..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106) 요크의 대주교 제프리 : 헨리 2세의 아들(첫번째)
요크의 대주교 제프리
Geoffrey
(c. 1152 – 12 December 1212),
sometimes called Geoffrey Plantagenet, fitzPlantagenet, or fitzRoy,
후에 요크의 대주교가 되는 제프리(조프루아)는 1152년 헨리 2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헨리 2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아니었으며 앙주 백작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그는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결혼하므로써 아키텐 여공작의 남편으로 아키텐 공작 지위를 이어받았었습니다.
헨리 2세
제프리의 아버지
제프리의 이름은 친할아버지인 앙주의 조프루아의 이름을 딴것으로 추정할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는데 제프리의 적대적인 인물이 기록한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기사의 딸이었다고 합니다. 그 연대기에서는 제프리가 헨리 2세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제프리의 정적이 쓴 연대기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할수 있습니다. 왜냐면 제프리에게는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 한명 더 있었는데 그는 헨리 2세의 아들이 아니엇고 이때문에 교육등에서도 차이가 나는듯합니다. 결국 이것은 헨리 2세가 제프리는 자신의 아들로 인정햇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제프리의 어머니가 로자문드 클리포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제프리는 아마도 헨리 2세가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결혼한 해에 태어난것이 분명하기에 로자문드는 확실히 그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할수 있습니다.
어쨌든 제프리는 헨리 2세의 여러 자녀들중 첫번째 자녀였으며, 그는 이복동생들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왕비
제프리가 태어난 얼마뒤 그의 아버지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며 아마도 이것은 제프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듯합니다. 제프리는 적자가 아니었기에 사회적으로 제약이 많았으며 이때문에 헨리 2세는 아들에게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자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했기에 제프리는 결국 성직자로 키워지게 됩니다. 고위 성직자가 된다면 그에 걸맞는 생활을 할수 있을뿐만 아니라 적자들의 상속권에도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죠.
제프리는 신학을 공부했으며 20살이 되기전인 1171년 이미 링컨에서 성직자로 지위를 얻었으며 1173년에는 링컨의 주교에 선출됩니다. 아마도 이런 빠른 승진은 그의 아버지가 헨리 2세였기때문이었을 듯합니다.
하지만 제프리의 상황에 대해서 탐탁치 않아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였습니다. 교황이 제프리의 고위 성직 임명에 대해서 반대하는 이유는 두가지 정도로 추정되는데 첫째는 그가 너무 젊어서 주교자리를 얻었다는 것과 두번째는 그가 사생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중세시대 사생아는 "죄악"의 결과였고 이때문에 사생아가 고위 성직자가 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던듯합니다. 이때문에 제프리는 로마로 갔었으며 결국 1175년 링컨의 주교로 인정받게 됩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제프리는 성직을 받긴 했지만 당시에 많은 귀족들처럼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교로 인정받기전 헨리 2세를 위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특히 1173년에서 1174년경의 스코틀랜드와의 전투에서 활약을 했는데 이 전투는 사실상 헨리 2세의 적자들의 반란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문에 헨리 2세는 아들인 제프리에 대해서 "내 다른 아들들이 진짜 bastard(사생아라는 의미로 뭐랄까 하여튼 좀 안좋은 뉘앙스인데 해석을 어떻게 해야할지...ㅎㅎㅎ)...이며 진정한 내아들임을 증명한 이는 그(제프리)밖에 없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1175년 링컨의 주교로 인정받은뒤 제프리는 성직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여러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교구 성당들에 여러가지 기부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아마도 그가 주교로써 링컨 교구의 영지에서 나오는 안정된 수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것입니다.
제프리는 성직자로써 공부를 하긴 했지만, 성직보다는 그의 아버지인 헨리 2세를 돕는 일을 더 자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 제프리가 성직자라기보다는 고위 귀족에 가깝게 여겨지는 상황이었으며 성직자로써의 그의 위치가 아매했을듯합니다. 결국 그는 1182년 링컨의 주교 지위를 사임했었습니다. 이후 그는 고위 관리로 아버지를 위해 일을 했습니다. 특히 1180년대 후반 프랑스쪽에서 리처드가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2세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것을 진압할때 역시 그는 아버지인 헨리 2세 곁에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때쯤 헨리 2세는 사망했으며, 헨리 2세가 죽을때 유일하게 아버지 곁에 있었던 아들이 바로 제프리였습니다. 제프리는 아버지가 죽을때쯤에 그의 지위를 확약받았는데 헨리 2세는 아들에게 "요크의 대주교"지위를 부여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헨리 2세의 씰을 도용해서 제프리가 자신의 지위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을 지킨 유일한 아들인 제프리를 위해서 헨리 2세가 그 지위를 부여해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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