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마리 만치니에 대해서 살짝 써볼까합니다.
번외편으로 넣는 이유는 정부가 아니어서 그렇다죠.
정부들과 그 후손들...번외편 1.마리 만치니 : 루이 14세의 첫사랑
안나 마리아 만치니
Anna Maria (Marie) Mancini
(August 28, 1639 – May 8, 1715)
프랑스식으로는 마리 망시니 정도 일테고 이탈리아식으로는 마리아 만치니일듯한데 이번에도 그냥 제맘대로 읽으렵니다.-0-;;;
마리 만치니는 유명한 마자랭의 조카들중 하나였습니다. 마자랭의 조카들로 "마자레네트"라는 이름으로 불린 만치니 자매들은 권력자였던 외삼촌 덕분에 모두들 결혼을 잘한것으로 알려져있었죠.
마리 만치니는 셋째딸이었는데 그녀가 특히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루이 14세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치니 가문의 문장
마리는 1639년 로마에서 만치니 남작이었던 로렌조 만치니와 그의 부인인 지롤라마 마자리니의 딸로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1650년 사망했고 어머니 만치니 남작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빠인 마자랭이 권력자로 있던 프랑스로 갑니다. 그리고 마리와 그 가족들은 모후였던 안도트리슈와 국왕 루이 14세 그리고 무슈인 필리프와 잘 알고 지내게 됩니다.
마리 만치니는 당대 기준으로 볼때 미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언니 올림피아처럼 짙은 머리색과 눈동자색의 이국적인 모습이었을것이라 추정됩니다. 게다가 매우 재치있고 위트있었으며 낭만적인 성격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마리 만치니는 루이 14세가 원하던 여성의 모습 그대로였을듯합니다.
이전에 이미 루이 14세는 마리의 언니 올림피아와 가깝게 지내는듯한 모습을 보여줬었습니다. 하지만 모후와 마자랭은 얼른 올림피아를 시집보내버렸죠. 하지만 마리 만치니와 루이 14세의 관계는 좀더 심각한 사이로 발전합니다.
마리
1665년경
루이 14세는 1658년 됭케르크 포위 공격때쯤 병을 앓게 됩니다. 심각한 상황이 되었고 마리 만치니는 국왕의 머리맡에서 그를 간호하면서 슬픔에 못이겨하고 있었죠. 이런 헌신적 간호후에 루이 14세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곧 궁정에서는 국왕이 마리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루이14세 역시 이런 상황을 숨기지 않았죠.
하지만 루이 14세는 국왕이었고 그의 결혼은 쉽게 결정할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마리의 외삼촌이었던 마자랭은 국왕이 조카와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평화를 위해 에스파냐의 인판타와 결혼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죠. 에스파냐 출신이었던 섭정모후 안 도트리슈 역시 이 계획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모후는 아들을 설득했고, 루이 14세는 마리와 슬픈 이별을 하게 됩니다.
루이 14세
이후 마자랭은 조카에게 서둘러 남편감을 찾아주게 됩니다.그것도 프랑스와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의 귀족을 찾아낸것이었습니다. 바로 팔리아노 공작이었던 로렌조 오노프리오 콜로나였습니다. 사실 마리의 아버지는 로렌조의 할아버지 밑에서 일을 했었기에 만치니 가문과 콜로나 가문이 아주 인연이 없었던것은 아니었던듯합니다. 콜로나 공은 사실 마리와 루이 14세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이 결혼은 정치적 목적이 강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는 루이 14세의 정부가 아니었고 둘의 관계가 육체적 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콜로나 공은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로렌조 오노프리오 콜로나
마리의 남편
팔리아노 공작이자 팔리아노 공
둘사이에는 모두 세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만, 세번째 아이를 낳은 직후 마리는 더이상 남편과 함께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콜로나 공작은 매우 방종했을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었던듯합니다. 아마도 당대 많은 가부장적 남편들처럼 자신의 방종함에도 아내에게만 순종을 강요했을수도 있었을듯합니다. 이에 대해 훗날 마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남편이 폭력적이었으며 목숨의 위협을 받아서 도망칠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마리는 이런 남편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오게되죠.
마리
마리가 프랑스로 돌아온 뒤 그녀는 다시 한번 첫사랑이었던 국왕과의 재회를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 만치니의 등장은 궁정여인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었죠. 결국 왕비인 마리 테레즈와 국왕의 정부였던 마담 드 몽테스팡은 서로 협력했고 마리는 루이 14세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마리는 남편이 사망하는 1689년까지 이탈리아로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남편이 사망한후에는 아이들을 보러 갔었던듯합니다. 마리는 루이 14세와 만나지 못했고 결국 궁정에 출입할수 없었죠. 후에는 언니 동생과 함께 가끔 잉글랜드를 여행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리에서 1715년 사망했었습니다.
동생 오르탕스와 함께 있는 마리
자료출처
1. 다음 카페 "로얄하우스(http://cafe.daum.net/yulia0818)"중 데크만님의 글 "사랑과 루이 14세"
2.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쓰고있는글들 > 월요일 : 정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부들과 그 후손들...(47)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 :루이 14세의 정부(두번째) (0) | 2015.05.11 |
---|---|
정부들과 그 후손들...(46)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 :루이 14세의 정부 (첫번째) (0) | 2015.05.04 |
정부들과 그 후손들...(45) 올림피아 만치니 : 루이 14세의 정부(??) (0) | 2015.04.20 |
정부들과 그 후손들...(44) 본 드 퐁스 : 루이 14세의 정부 (0) | 2015.04.13 |
정부들과 그 후손들...(43)카트린 샤를로트 드 그라몽 : 루이 14세의 정부 (0) | 2015.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