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하하..--;;정신없이 놀다보니 글쓰기가 어렵군요..ㅠ.ㅠ
매일 글쓰다 안썼더니 광고 댓글이나 달리고 말입니다....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28)앙투아네트 드 퐁스 : 프랑스의 앙리 4세의 정부
앙투아네트 드 퐁스-리베락
라 로슈기웅 백작부인
게르슈발 여후작
Antoinette de Pons-Ribérac,
(1560-1632)
앙투아네트 드 퐁스-리베락은 1560년경 마렌의 백작이었던 앙투안 드 퐁스-리베락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고위 귀족의 딸로 앙리 3세의 궁정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라 로슈기웅 백작이었던 앙리 드 실리와 결혼해서 아들을 한명뒀지만 1584년 그녀의 남편은 사망합니다.
앙투아네트는 앙리 4세와 이브리 전투(battle of Ivry) 직후에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1590년 앙리 4세의 정부가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매우 아름다웠으며 신앙심 깊었고 자비심이 깊었다고 알려진 그녀는 처음에 앙리 4세의 정부가 되길 거절했다고 합니다.앙리는 앙투아네트에게 결혼하겠다는 맹세를 했지만,그녀는 앙리에게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정부가 되기에는 넘친다"라는 말로 그를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어랏 이 말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에드워드4세한테 햇다는 그 말 ??)
이때문에 그녀가 앙리4세의 정부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른듯합니다만, 정부였다고 해도 매우 짧은 시기였거나 아니면 단순히 지나가는 관계였거나 아니면 아예 정부가 아니었을수도 있을듯합니다.
루벤스가 그린 이보리 전투
하지만 앙투아네트가 앙리 4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것은 사실이었던듯합니다. 왜냐면 후에 앙리 4세는 자신의 두번째 아내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왔을때 앙투아네트를 아내의 시녀로 삼았고 앙투아네트는 국왕과의 친분관계는 물론 왕비와도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마리 드 메디시스
앙리 4세의 왕비
이런 앙투아네트의 영향력은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가 예수회를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먼저 그녀는 국왕의 고해신부가 되는 코통신부를 후원했다고 합니다.또 그녀가 예수회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활동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신앙심 깊었던 앙투아네트는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서 예수회가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이런 상황은 그녀에게 "캐나다의 군주"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수여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코통 신부
....뭐라고 말이 많이 나오던데 읽기 귀찮습니다.-0-;;
앙투아네트는 1594년 보몽 백작이었던 샤를 뒤 플레시-리앙쿠르와 결혼했고 둘사이에는 두명의 자녀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앙투아네트와 두번째 남편 사이의 아들이었던 로게르 뒤 플레시는 리앙쿠르 공작으로 어머니의 영향력을 이어받아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관여했는데 현재 몬트리올이 되는 "빌-마리"(성모마리아를 기념한 이름이라고 합니다.)를 건설한것도 바로 앙투아네트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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