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49)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엘아라 2013. 8. 2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하하..더워서 글쓰기 싫어요..ㅠ.ㅠ

컴님만 잘 돌아가면 어디 시원한곳에 가서 글을 쓰겠는데...어흑..컴님도 말을 안들어서 말입니다.

(...--;;아이패드용 블루투스 키보드를 하나 지를까요...ㅠ.ㅠ)


하여튼 원래 결혼안하고 죽은 두딸을 하나로 묶을려고 햇는데...-0-;;

그냥 두개로 나눕니다.-0-;;;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49)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요한나 가브리엘라 여대공

Maria Johanna Gabriela of Austria 

Maria Johanna Gabriele Josefa Antonia;

(4 February 1750 – 23 December 1762)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 여대공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의 열한번째 아이이자 아홉번째딸로 1750년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요한나나 요한나 가브리엘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1758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그리고 자녀들


요한나 가브리엘라는 밑으로 태어난 동생들인 마리아 요제파,마리아 카롤리나,페르디난트 카를, 마리아 안토니아와 함께 황실 보육실Kindskammer에서 함께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보모와 고용인들의 손에 키워졌는데 사실 당대의 왕가에서는 이런 양육법이 보편적이었습니다. 부모는 정치적 행사등으로 인해 매우 바빴기때문이죠. 요한나 가브리엘라는 어린시절부터 형제 자매들과 매우 사이좋게 지냈다고 합니다.


요한나는 한살 아래의 동생이었던 마리아 요제파와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둘은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에 늘 함께 했으며 둘을 돌보던 가정교사도 같은 사람들이었기에 함께 있는 시간이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요한나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을 직접 돌볼 시간이 없었지만 늘 자녀들의 교육 진도에 대해 보고를 받았으며 자녀들에게 다양한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요한나 역시 욍국어와라틴어,음악,미술,춤 등의 여러가지를 교육받았습니다.



요한나와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테레지아는 음악과 춤을 매우 사랑했으며 자녀들에게도 이에 대해 교육을 집중적으로 시켰다고 합니다. 요한나 역시 음악과 춤을 수준 높게 배웠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은 자주 궁전에서 부모나 형제 자매들을 위해 공연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을 대부분 정략결혼시켰으며, 요한나 가브리엘라도 마찬가지로 혼담이 진행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딸을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3세의 아들이었던 나폴리와 시칠리의 국왕이었던 페르디난도와 결혼시키기로 카를로스 3세와 합의를 봤습니다. 첫 신부 후보는 요한나의 언니였던 마리아 아말리아였죠. 하지만 마리아 아말리아가 페르디난도보다 다섯살이나 많았기에 에스파냐 측에서는 혼담을 파기하려했으며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아 아말리아의 여동생이나 페르디난도보다 한살 많았던 요한나를 페르디난도와 약혼시키려합니다.


하지만 요한나는 1762년 천연두로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빈에는 천연두가 아주 유행했는데, 죽은 아이들 10명중 아홉명이 천연두로 사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황실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요한나가 죽기 전해인 1761년에는 요한나의 오빠인 카를 요제프가 사망했으며, 요한나의 가장 가까웠던 자매인 마리아 요제파 역시 천연두로 사망하게 되죠.




요한나 가브리엘라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