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합스부르크 여대공들은 했던 사람도 또하기 때문에 마리아 아말리아도 또하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앞쪽 글과는 좀 미묘하게 다릅니다.-0-;;;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40) 마리아 아말리아 : 황제 요제프 1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바이에른의 선제후비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Maria Amalia of Austria
Maria Amalie Josefa Anna
(22 October 1701 – 11 December 1756)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제프 1세와 그의 부인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나기 직전 오빠이자 후계자였던 레오폴트 요제프 대공이 사망했으며, 빌헬미네 아말리아는 마리아 아말리아를 낳은뒤 더이상 아이를 낳을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 아말리아의 할아버지인 레오폴트 1세는 합스부르크가문의 남성직계가 두 아들인 요제프와 카를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심지어 요제프에게는 더이상 적자를 기대하기 힘들었기에 계승순서에 두 손녀들도 포함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숙부인 카를이 즉위하면서 일이 묘하게 꼬이게 되죠. 아버지인 요제프1세가 사망한뒤 숙부인 카를이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한뒤인 1713년 국사조칙을 통과시키게 되는데 여기서 황제는 계승순서에서 조카들보다 자신의 후손을 우선순위로 둡니다. 사실상 황제는 아들이 태어날것이라 기대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고해도 문제가 없을것이라 여겼었죠.하지만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결국 상속때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부모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1세와 그의 부인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아
어린시절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은 자신감 넘치는 성격으로 강아지들을 사랑했었다고 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처음에는 사보이 공작의 후계자였던 비토리오 아메데오와 혼담이 진행되었습니다. 사보이 공작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은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때 사이가 벌어졌기에 이 혼담으로 둘의 사이가 좋아지길 바랬었죠. 하지만 비토리오 아메데오의 아버지였던 사보이 공작이 이 결혼에 반대하면서 결국 혼담은 없었던것이 됩니다.
대신 마리아 아말리아는 바이에른 선제후의 후계자였던 카를을 만나게 됩니다. 카를이 터키와의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잠시 빈에 들렀던 1717년에 둘은 처음 만났었습니다. 그리고 터키와의 전투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빈에 들러 마리아 아말리아를 만나게 되죠. 바이에른의 카를은 경제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로 황제의 조카와 결혼하길 원했습니다. 사실 그가 원한 사람은 마리아 아말리아의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였지만 마리아 요제파는 이미 결혼하기로 결정된 사람이 있었기에 결국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하게 되었죠. 1722년 마리아 아말리아와 바이에른의 카를은 결혼했는데 결혼식은 매우 호화로웠다고 합니다. 또 마리아 아말리아는 결혼때 매우 많은 혼수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카를 6세가 조카에게서 "계승권을 뺏은 것에 대한 위로"가 아니었을까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남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7세
바이에른의 선제후
그는 황제로 즉위한 직후 영지를 오스트리아군에게 장악당했으며 즉위했던 프랑크푸르트에 거의 갇혀서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그에 대해서 당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좋은 황제"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남편인 카를은 많은 정부들이 있었고 마리아 아말리아는 이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만, 남편과 함께 취미를 공유했으며, 함께 사냥을 다니고 여행을 하는등 남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했습니다. 또 어머니처럼 매우 자비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뮌헨의 님펜부르크 궁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숙부인 카를 6세가 사망하자, 마리아 아말리아의 남편인 카를은 국사조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내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죠. 그리고 늘 우호적으로 지냈던 프랑스와 함께 에스파냐, 프로이센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죠. 마리아 아말리아의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는 동생과 제부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양보했습니다. 남편이 황제가 되면서 마리아 아말리아도 황후가 되죠. 하지만 카를 7세가 즉위한 직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서 카를의 영지였던 바이에른이 장악당햇고 카를은 이름밖에 없는 황제가 됩니다.
카를 7세의 즉위식
바이에른의 군대가 다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기 시작했으며 결국 바이에른을 떠나게 되고 카를 7세는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으로 돌아온 직후 사망합니다. 남편이 죽은후 마리아 아말리아는 더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게 됩니다. 그녀는 아들인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에게 오스트리아와의 평화 협정에 서명하라고 요구하죠. 이때 바이에른은 전쟁을 주장하던 파와 평화를 주장하던파로 나뉘었는데 이 평화를 주장하던 파의 대표가 마리아 아말리아였죠. 결국 바이에른군이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오스트리아와 평화를 위해 자신의 황위계승권리를 포기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황제가 되는것을 인정합니다.
마리아 아말리아의 장남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와 카를 7세 사이에는 모두 일곱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중 유일하게 성인이 될 때 까지 살아남은 남성후계자인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의 선제후가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녀가 없었고 이때문에 바이에른 선제후령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또다른 분가인 팔츠 가문으로 넘어가는데 이것은 후에 바이에른 계승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큰딸인 마리아 안토니아는 사촌인 작센의 선제후와 결혼했었으며 그녀의 아들들은 작센의 초대 국왕이 되죠. 또 막내인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아들인 요제프 2세와 결혼했습니다만 둘의 관계는 매우 불행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남편이 죽은 12년뒤 뮌헨의 님펜부르크 궁전에서 사망했습니다.
마리아 아말리아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독일어+구글 영어 번역 포함)
2.영원한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오영옥,나남,2009)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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