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2) 마리아 :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엘아라 2012. 10.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별 자료가 없군요..-0-;;;;

아마 평탄한 삶을 살아서 그런듯하네요.

하여튼 여러가지 다 뒤졌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2) 마리아 :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윌리히-클레베스-베르크 공작부인

Archduchess Maria of Austria 

(May 15, 1531 – December 11, 1581)


마리아 여대공은 페르디난트 1세와 그의 부인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의 셋째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도 다른 자매들처럼 정략결혼을 해야할 운명이었습니다.


마리아는 15살인 1546년 자신보다 열다섯살이 많은 윌리히-크레베스-베르크의 공작인 빌헬름과 결혼합니다. 빌헬름과 마리아의 결혼은 완전히 정치적 목적이었죠.



마리아의 남편

윌리히-클레베스-베르크의 공작 빌헬름 5세



윌리히-클레베스-베르크 공작인 빌헬름은 북부 독일의 주요한 지역의 공작이었습니다. 그의 여동생은 바로 헨리 8세가 초상화를 보고 청혼해다가 실망스러워했다는 클레이브의 앤입니다. 헨리 8세가 앤과 결혼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윌리히 공작가문이 합스부르크가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빌헬름은 아버지로부터 클레베스를 상속받았으며, 어머니로부터 윌리히와 베르크를 상속받았죠. 빌헬름은 자신의 영지외에도 인근의 겔데른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주장합니다. 겔데른 공작령은 "저지주"에 속한 공작령으로 이에 대해서 윌리히 공작가문이나 에그몬트 가문(네덜란드 출신의 통치가문중 하나)나 부르고뉴 공작가문에서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죠. 결국 이런 문제는 부르고뉴 공작가의 상속자들인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분쟁을 치룰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백부

황제 카를 5세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에그몬트 가문의 권리를 돈으로 샀다고 주장하면서 겔데른 공작령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빌헬름은 카를 5세와의 분쟁을 피할수 없다고 여겼으며 프랑스와 손을 잡게 되죠. 그는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조카인 나바르의 잔 달브레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된후 프랑스는 빌헬름을 도와줄수 없었죠. 결국 빌헬름은 겔데른과 인근 지역의 상속권을 포기해야했습니다. 정략결혼이었던 잔 달브레와의 결혼을 무효로 한뒤 그는 카를 5세의 조카와 정략결혼을 합니다. 카를 5세는 자신의 후손들이 단절된다면, 조카와 결혼한 빌헬름과 그 직계 남성후계자가 겔데른 공작령을 상속받도록 한다고 했습니다.다시 말해서 그냥 영지를 뺏은것이죠.--;;;



마리아


마리아는 빌헬름과 결혼한뒤 모두 일곱명의아이를 낳았습니다. 큰딸인 마리 엘레오노레는 프로이센 공작과 결혼했으며 마리 엘레오노레의 후손들은 영국 국왕, 프로이센 국왕 러시아 황제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들은 후손을 얻지 못하고 죽었기에 후에 윌리히 계승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리아는 일반적으로 할머니 후아나 라 로카처럼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보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우울한 정도였지만 후에는 거의 정신불안 증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독일 북부나 북유럽의 음침한 기후가 성격에 영향을 줬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죠. 게다가 어린나이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가문의 사이도 별로 좋지 않은 남자와 결혼했으니 솔직히 결혼초에 우울한것은 당연했을듯도 합니다.


큰딸인 마리 엘레오노레와 함께 있는 마리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독일어 + 구글 번역기 포함)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