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중 합스부르크가 이전에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 나와있네요.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늦은나이에 결혼했고 후계자가 태어날때 40살쯤 됐었다는 이야기를 읽은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기억한답니다.
중세시대에 40살이면 이미 할머니로 여겨지던 나이였기에 출산을 한다는것 자체가 특이한 일이었고, 이때문에 후계자에 대한 의혹이 발생할수 있었다죠. 그래서 과감하게 증인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봤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들...(12) 시칠리아의 콘스탄자: 하인리히 6세의 황후
알타빌라의 콘스탄자(콘스탄자 달타빌라)
시칠리아의 여왕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Constance of Hauteville
(2 November 1154 – 27 November 1198)
시칠리아의 콘스탄자는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었던 루게로2세와 그의 세번째 부인인 르텔의 베아트릭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루게로2세는 중세 이탈리아의 위대한 국왕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시칠리아와 그 인근을 다스리던 노르만계열의 왕국(바이킹의 지배하에 있던 곳들)을 통합한 국왕이었으며, 아랍과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했죠. 콘스탄자는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루게로2세가 사망했을때 베아트릭스는 임신한지 한달도 되지 않았었습니다.
콘스탄자의 부모
루게로 2세와 베아트릭스
콘스탄자는 30살이 될때까지 어느 누구와도 약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략결혼이 보편적이었던 중세에서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시칠리아 왕국같이 강대한 왕국의 상속권을 가진 여성에게 혼담이 없다는것은 이상한일이었습니다. 콘스탄자에 대해 혼담이 없었던것에 대해 콘스탄자가 수녀가 되길 바랬다는 이야기와 그녀의 외모가 못생겨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후대에 나온 이야기로, 혼담이 없었던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콘스탄자는 막내 조카인 아리코가 사망하자 시칠리아 왕국의 추정 왕위계승자가 됩니다. 당시 국왕은 콘스탄자의 조카인 굴리엘모 2세였지만 (그는 콘스탄자보다 1살 많습니다.) 그역시 당시에는 미혼이었으며 후에도 후계자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때문에 콘스탄자는 막강한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녀가 되었지만, 굴리엘모2세는 고모의 혼처를 바로 찾지 않았습니다. 한 학자는 이에 대해 굴리엘모 2세가 독일쪽과 연합하는것을 원치 않았기에 고모이자 후계자가 될수도 있는 콘스탄자의 혼처를 찾는것을 미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콘스탄자의 조카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
1184년 콘스탄자는 드디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하인리히와 약혼합니다. 하인리히는 콘스탄자보다 11살 어렸으며, 약혼당시 콘스탄자는 30살 하인리히는 19살이었죠. 그리고 약혼 2년후인 1186년 콘스탄자와 하인리히는 결혼을 합니다. 이 결혼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그다지 환영하지 않던 결혼이 됩니다. 황제의 적들은 황제가 남부 이탈리아 지방까지 손에 넣는것을 원치 않았고,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북부 독일 출신의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자신들을 지배하는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인리히와 콘스탄자의 결혼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는 자신의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왕위를 유일하게 남은 적법한 후계자인 콘스탄자에게 물려주겠다고 공포했고 유력 귀족들에게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서약시켰습니다. 하지만 1189년 굴리엘모 2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사태는 달라집니다. 이탈리아 귀족들은 독일인 남편과 공동으로 통치하게될 콘스탄자를 거부하고, 콘스탄자의 또다른 조카인 트란크리디를 국왕으로 내세웁니다. 트란크리디는 콘스탄자의 이복오빠였던 아풀리아의 공작 루게로 3세 (콘스탄자의 아버지 시칠리의 루게로 2세의 장남)아들이었지만 서자였기에 정당한 왕위계승자는 아니었습니다.
1190년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사망한자, 콘스탄자의 남편인 하인리히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며 1191년 황제로 대관합니다. 콘스탄자 역시 이때 황후로 대관하죠. 대관식이 끝난후 콘스탄자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해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로 진격합니다. 북부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이 콘스탄자와 그녀의 남편 하인리히 6세의 편이 됩니다. 하지만 나폴리에서 교착상태에 빠졌고 전염병이 돌게 되어 결국 하인리히는 퇴각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콘스탄자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인근 마을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인근 지역 사람들은 하인리히가 철수하자 모두 트란크리디측으로 돌아섰으며, 황후는 인질이 될뻔합니다. 간신히 알프스를 넘어 독일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의 콘스탄자
1194년 트란크리디가 사망하자, 하인리히6세는 다시 군대를 조직해서 이탈리아로 갑니다. 이제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갔으며, 다시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이 하인리히에게 항복을 하죠. 그리고 트란크리디의 아들인 굴리엘모 3세를 대신해서 하인리히가 시칠리아의 국왕이 됩니다. 콘스탄자는 이번에는 남편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는데 왜냐면 이때 콘스탄자는 임신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임신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믿지 못할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콘스탄자는 아이를 낳을때 수많은 증인을 내세울 방법을 모색합니다. 콘스탄자의 아이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후계자인 동시에 시칠리아 왕국의 후계자이기도 했고, 만약 조금의 의심이라도 생긴다면 조카의 아들인 굴리엘모 3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콘스탄자는 안코라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아이를 낳을 산실을 마을의 광장 한복판에 설치했습니다. 이곳은 시장통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곳이었죠. 그곳에서 콘스탄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이를 낳는것을 지켜보도록 해서 아이가 자신의 친아이라는것을 입증하게 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대관한 다음날인 1194년 12월 26일 콘스탄자는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습니다.
콘스탄자의 출산
콘스탄자는 비록 시칠리아 왕국의 후계자였지만 남편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다른 중세 여성들처럼 정치에 크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듯합니다. 1197년 시칠리아에서는 외국 군주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고,하인리히는 이를 진압하던 와중 말라리아로 사망합니다.
콘스탄자의 남편인 하인리히가 죽자 콘스탄자의 아들인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의 국왕 프레데리코로 즉위합니다. 비록 자신도 "여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콘스탄자는 아들의 섭정으로 나라를 통치합니다. 콘스탄자의 통치 스타일은 남편과 달랐는데 그녀는 철저하게 시칠리아 왕국만을 위한 통치를 했습니다. 남편을 따라왔던 독일 지역의 신하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지역 조언자들의 조언을 들었으며, 아들이 시칠리아 국왕으로 대관한후에는 남편이 가졌던 다른 독일 지위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아들의 시칠리아 국왕지위를 굳건히 하는데 주력합니다.
아들이자 후계자인 프리드리히와 함께 있는 콘스탄자
콘스탄자는 남편이 죽은 다음해인 1198년 사망했습니다. 콘스탄자가 사망할때 아들인 프레데리코는 겨우 세살이었으며, 이에 콘스탄자는 죽기전 교황 이노센트 3세에게 아들의 후견을 부탁합니다.
콘스탄자의 의도와 달리 콘스탄자의 아들인 프레데리코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됩니다.
콘스탄자의 아들
시칠리아의 프레데리코 1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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