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국왕이 되지 못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들...(4) 앤여왕의 아들 :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

엘아라 2011. 7. 1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앤 여왕이 즉위하던 때는 좀 복잡했습니다. 앤 여왕의 아버지인 제임스 2세는 형부와 언니인 윌리엄과 메리에 의해서 쫓겨난 상황이었죠. 그리고 언니와 형부가 후계자가 없자 그녀가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아이를 무척이나 많이 낳았지만 살아남는 아이가 거의 없었기에 후계자 문제가 살짝 골치아프게 돌아갑니다.

 

국왕이 되지 못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들

(4) 앤여왕의 아들 :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

 

명예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쯤의 잉글랜드 국왕은 제임스 2세였습니다. 여전히 의회와 왕가는 마찰을 빚고 있었으며, 특히 카톨릭에 대한 왕가의 호의는 잉글랜드 의회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임스 2세에게는 첫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두 딸들인 메리와 앤이 있었고 둘다 신교도로 신교도 남편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제임스 2세가 카톨릭이더라도 후계자는 신교도이기에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 2세가 재혼해서 아들이 태어나자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 이는 명예혁명으로 이어집니다.

 

 

제임스2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모데나의 마리

 모데나의 마리가 아들을 낳았을때 실은 그 아이가 제임스 2세의 아들이 아니라 데려온 아이라는 풍문이 파다했는데 이는 "워밍팬 스캔들"이라고 알려지게 됩니다.

 

뛰어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아내와 함께 공동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이 된 윌리엄에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후계자 문제였죠. 특히 아내 메리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더욱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제임스 2세의 아들(올드 프리텐더)가 있었기에 자신이 죽고 나면 왕위는 다시 카톨릭교도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죠. 그는 아내가 죽은후 자신의 후손이 잉글랜드의 왕위를 물려받아도 된다는 법률을 통과시켰습니다만, 그는 재혼할 의사가 없었다고 합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국왕

윌리엄 3세(스코틀랜드는 2세)와 메리 2세

윌리엄3세는 어린시절 아버지가 죽고 신하들이 오라녜가에서 독립하기 위해 그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녔으며 권신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죠.

 

이때문에 그의 후계자는 메리의 동생인 앤이었죠. 앤 공주는 덴마크의 왕자인 율겐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는데, 아내의 백부였던 찰스 2세는 그에게 컴벌랜드 공작 지위를 줬습니다. 그리고 영국식으로 "조지"라는 이름으로 불렸죠.앤과 조지는 매우 조용한 삶을 살길 원했다고 합니다. 특히 윌리엄 3세는 동서였던 조지가 정치에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조지 역시 정치나 권력에 뜻이 없었다고 합니다.

 

 

앤 여왕과 남편 컴벌랜드 공작 조지

조지는 동서였던 윌리엄과 달리 정치적으로 큰 야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아내와 공동으로 즉위하는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여왕의 부군으로 아내를 돕는 일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앤은 무려 17번이나 임신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영아시절을 넘기지 못하죠.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는데 앤 공주가 RH-혈액형을 가지고 있었는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는 의견과 조지가 매독에 걸렸기 때문에 건강한 아이를 낳을수 없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어쨌든 앤의 아이들중 영아기를 넘긴 아이는 유일하게 윌리엄밖에 없었습니다. 윌리엄이 태어났을때, 앤의 형부이자 국왕이었던 윌리엄 3세는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따서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글로스터 공작 칭호를 부여합니다. 적어도 아이가 영아기를 넘겨 성장할것이 확실해지자 모두들 이제 제임스 2세의 아들에 대한 생각을 잊을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아들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과 함께 있는 앤 공주

 

윌리엄은 영아기를 넘기긴 했지만 건강한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죽을뻔했고, 아이의 발육 역시 느렸는데, 걷거나 말하는것 역시 다른 아이보다 늦어졌고 이때문에 교육 역시 늦춰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라서도 계단을 오르내릴때 도와주는 이가 꼭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육체와는 달리 윌리엄의 마음은 매우 날카로웠다라고 표현되었으며 조용한 조숙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윌리엄,글로스터 공작

 

 

이모부인 윌리엄 3세는 허약했지만 조숙하고 총명했던 윌리엄에게 희망을 걸었고 그가 훌륭한 왕위계승자가 될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아홉살이 되던해에 그에게 따로 궁정을 갖게 했으며, 가터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모인 메리2세 역시 하나밖에 없는 조카인 윌리엄을 끔찍히도 아꼈다고 합니다.

 

윌리엄은 11살이 되던 1700년 7월 24일에 성대한 생일 축하파티를 열었으며 거기 참석해서 오래도록 있었습니다. 허약한 윌리엄은 완전히 지쳤는데 다음날부터 두통을 호소했으며 목이 붓기 시작합니다. 의사가 와서 왕자를 진찰한후 열을 내리기 위해 사혈을 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으며, 결국 당대 최고의 의사가 급히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왕자에게 누가 사혈시켰냐고 화를 내면서 더이상 손쓸 도리가 없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사혈때문에 사망하게 된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왕자는 확실히 죽어가고 있었고, 1700년 7월 30일 그는 사망합니다. 이후 증상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뇌수종으로 사망한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가터 훈장의 로브를 입고 있는 글로스터 공작

 

그가 죽은후 앤은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고 수많은 아이들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아이마저 잃은데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조지 역시 아내와 함께 아무말없이 있을뿐이었죠.

 

윌리엄이 죽자 의회는 다시 왕위계승자문제에 휩쌓입니다. 카톨릭교도를 왕위계승자로 받아들일수 없었기에 1701년 카톨릭 교도를 왕위계승권에서 배제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이 법령이 통과된후, 카톨릭교도거나 카톨릭교도와 결혼한 수많은  찰스 1세의 후손들은 왕위계승권에서 배제됩니다. 이 조건에 맞는 인물은 하노버의 선제후비 조피와 그녀의 아들인 게오르그 루드비히로, 조피는 제임스 1세의 외손녀이자,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였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딸이었습니다.  

 

 

하노버의 선제후비 조피와 그녀의 아들 게오르그 루드비히

 

 

윌리엄 왕자가 죽은 2년후인 1702년 윌리엄의 어머니 앤은 잉글랜드의 앤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앤의 후계자로 조피와 그녀의 아들이 이미 결정된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잉글랜드 의회는 이를 수용했지만 스코틀랜드 의회는 이를 수용하지 않으려합니다. 이에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웠던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해서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한편,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을 서두르게 됩니다. 그 결과 앤 여왕은 통합된 나라의 군주가 되었고 이후 "영국"이라는 나라가 생기는 바탕이 되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에 대한 법률이 통과한후 사용한 앤 여왕의 Heraldic badge

왼쪽은 잉글랜드를 나타내는 튜더 장미이고 오른쪽은 스코틀랜드를 나타내는 엉겅퀴꽃입니다.

두 나라가 통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Heraldic badge라는 것은 문장이랑 비슷한것으로 개인을 식별해주는것이었습니다. 문장이 주로 방패에 그려지는것과 달리 이것은 배지 형태 옷에 부착하는데 주로 잉글랜드에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http://www.channel4.com/history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