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영국 다큐중에 Hitler's favorit royal 이라는 다큐가 있습니다. 이 다큐의 주인공은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인 카를 에두아르트에 대한것입니다. 그는 태어날때는 찰스 에드워드로 태어났습니다. 전 솔직히 나치라면 일단 거리감이 느껴지거든요. 어쨌든 카를 에두아르트에 대해서는 안 좋은 이미지인데.... 이 다큐를 보고서는 나치가 되기 전까지의 그의 모습에 쬐금 동정이 느껴졌다죠. -0-;;; 하지만 저의 평가(...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지 말라는 소릴했던 어머니 헬레나 공작부인이 아들을 봤다면 얼마나 슬펐을까...-0-;;;)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좌절감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막나가면 안되죠.-0-;;;
알바니 공작 찰스 에드워드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
Charles Edwar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Leopold Charles Edward George Albert; German: Carl Eduard Georg Albert Luitpold)
(19 July 1884 – 6 March 1954)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그결과, 영국 국왕, 독일 황제, 러시아 황후, 스페인 왕비, 그리스 왕비, 노르웨이 왕비 등과 사촌)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의 사촌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아들이자 혈우병 환자였던 알바니 공작 레오폴트는 1884년 2월 의사들의 충고에 따라 추운 영국을 떠나 따뜻한 니스로 갔다. 그의 부인인 발덱-피르몬트의 헬레나는 남편을 무척이나 존경하고 사랑했었다. 헬레나는 남편을 따라 가고 싶어했지만 그녀는 임신중이었기에 곧장 남편을 따라 갈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후 레오폴트는 계단에서 떨어졌고 그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헬레나는 남편이 죽은후 유복자를 낳았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사내아이였다.레오폴드 찰스 에드워드 조지 앨버트로 세례받았고 찰스 에드워드로 불린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알바니 공작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아들
알바니 공작 레오폴드
혈우병때문에 그는 형들과 달리 군에 들어갈수 없었고, 대신 공부를 해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레오폴드는 자신을 과보호하는 어머니를 답답해했지만, 그렇다고 여왕이 아주 살갑게 대한것도 아니라서 한때 막내동생인 베아트리스와 약간 껄끄러운 사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왕이 다른 아이들과 달리 베아트리스를 특별히 귀여워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약간 질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레오폴드는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누나 루이즈와 굉장히 친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곁에 붙잡혀서 가족외 다른 친구를 전혀 못사겼던 시절 레오폴드와 베아트리스는 서로에게 위안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찰스 에드워드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지만 영국 왕위계승권에서 한참 멀리 있는 방계 왕족이었고,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 공작부인은 궁정에서 떨어진 시골 한적한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찰스 에드워드는 누나인 앨리스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죠. 하지만 찰스 에드워드와 앨리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주들이었고, 궁정을 완전히 벗어나서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 아이들과 친해질수 없었던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인 앨버트 공은 부인에게 "아이들과 친해지지 않는것이 안타깝소"라고 할정도였습니다.덧붙여서 "그렇게 잔소리만 하면 아이들과 친해질수가 없소"라는 소리도 했죠) 나이가 들면서 바뀌었습니다. 여왕은 점점 좋은 할머니로 변했고, 엄격했지만 자상하면서 가끔 농담도 하는 재미난 할머니가 됩니다. (외손녀인 헤센의 빅토리아는 엄격한 할머니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덜 엄격해지는 모습에 당황했다고 합니다.)
손자의 삶을 확 바꾸신 빅토리아 여왕
영국과 아일랜드의 여왕이자 인도의 여제
이런 행복한 삶은 찰스 에드워드가 16살때 끝나게 됩니다. 여왕의 둘째 아들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프러드 공작이 사망하자 공작령의 상속 문제가 발생하죠. 앨프러드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습니다. 그때문에 공작령은 영국 왕실 가족중 누군가가 상속받아야했죠. 당시 웨일즈 공이었던 에드워드7세는 영국 왕위계승자가 외국 군주가 되는것을 금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외국의 군주가 되려면, 영국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해야했죠. 에드워드7세의 아들은 둘이었지만, 큰아들인 앨버트 빅터 (에디)왕자는 이미 죽었고, 남은 아들은 왕위계승자였죠. 이때문에 상속권은 앨프러드의 동생인 코넛공작인 아서와 그 아들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코넛공작과 그 아들은 조국인 영국을 떠나 외국(독일)의 군주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공작령의 상속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공작령의 상속권은 다음 순위였던 알바니 공작 찰스 에드워드에게 왔죠. 찰스 에드워드의 어머니인 헬레나 공작부인 역시 어린 아들이 독일의 군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령을 잃는것을 싫어했습니다. 여왕의 손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외국 영지였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사랑하는 남편 앨버트가 자랐고, 그와의 추억이 깃들어있는 코부르크를 다른 가문에 넘겨줄수는 없었죠. 아들의 상속을 반대해달라는 헬레나 공작부인의 청에 빅토리아 여왕은 "공작령을 받아들이는것이 왕족의 의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왕의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하는 것"이었고 결국 공작부인은 아들의 상속을 받아들입니다.
며느리와 딸 손주들과 함께 있는 헬레나 공작부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카를 에두아르트의 누나인 애쓰론 백작부인인 앨리스 공주입니다.
아이는 딸인 테크의 메이
서있는 사람이 카를 에두아르트의 부인인 빅토리아 아델하이트입니다. 아이는 모릅니다..아하하..-0-;;
16살에 어머니와 사랑하는 누나와 떨어져 독일로 간 찰스 에드워드는 이름마저 "카를 에두아르트"라고 바뀝니다. 그리고 아직 정식으로 통치할 나이가 되지 않았기에 섭정이 필요했는데, 섭정으로는 호엔로에-랑겐부르크의 에른스트 공이 됩니다. 그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사촌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렉산드라의 남편이었습니다. (앨프러드의 사위죠.) 그리고 에른스트 공을 후원한 사람은 바로 카를 에두아르트의 사촌인 독일의 빌헬름2세였습니다.
1차대전 전의 칼 에두아르트
영국인이었던 찰스 에드워드에게 독일의 군주가 된것은 큰 혼란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영국인으로 생각했지만, 독일의 군주가 되었기에 이제 독일인이 되어야했죠. 그의 이런 혼란은 1차대전때 극에 달합니다. 1차대전이 일어나자, 영국과 독일은 적이 되었습니다. 독일 황제와 영국 국왕이 사촌간이었던것처럼,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 둘다 사촌이었죠. 그는 자신의 새조국이 된 독일에 충성을 다할것을 선택합니다. 그는 이런 결심을 자신의 영국 훈장들을 돌려보내는것으로 표시했고, 이에 영국측과 독일측은 서로 왕족들의 이름은 자신의 훈장들에서 삭제합니다. (후에 헤센의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의 아들인 헤센의 루드비히공은 사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카를 에두아르트가 경솔하게 훈장들을 돌려보냈기에 헤센 대공의 가터훈장마저 삭제당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 헤센 대공의 가터 훈장은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수여했습니다. 여왕은 가터 로브를 입은 외손자를 보고 "네 아버지처럼 참 잘 어울리는구나"라고 했고, 헤센의 대공은 이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그는 가터 훈장에서 삭제당한것에 무척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1차대전때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군인들
악수하는 사람이 카를 에두아르트입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이런 선택은 독일 패망이후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독일제국이 무너지고 대부분의 군주국들이 공화국이 되었던것처럼 그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역시 공화국이 됩니다. 그는 이제 군주가 아니게 되죠.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영국에서는 그를 배신자로 여깁니다. 결국 카를 에두아르트에게는 더이상 갈곳이 없어지게 된것이죠.(여기까지 보면 참 안됐다는..)
전후 나치가 급성장하게 되었을때, 독일의 대부분 왕족들이 나치가 자신들의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아줄것으로 생각합니다. (재미난것은 독일의 빌헬름2세와 그의 상속자인 황태자 빌헬름은 나치에 대해서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고 합니다. ) 카를 에두아르트역시 나치가 자신의 지위를 다시 찾아주리라 여겼죠.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의 초기부터 매우 깊이 관여했습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딸인 시빌라는 자신의 육촌이자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인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와 1932년 결혼합니다. 독일에서 치뤄진 결혼식은 나치 행사로 치뤄졌는데 이때문에 스웨덴 내 여론이 악화되어서 스웨덴 왕실에서는 이결혼식에 참석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의 아버지인 왕태자-후에 구스타프6세 아돌프-는 친 영국파였지만, 왕자의 할아버지인 구스타프5세는 친 독일파였으며 그는 손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길 바랬다고 합니다.)
시빌라 왕자비와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언제인지 잘 모르겠는데 결혼식은 아니라는거죠. 아마 약혼이나 결혼 직후쯤인듯합니다.
왼쪽에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칼 에두아르트), 스웨덴의 왕태자 (후에 구스타프6세 아돌프), 시빌라 왕자비,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애쓰론 백작부인(카를 에두아르트의 누나인 앨리스 공주), 스웨덴의 왕태자비(후에 루이즈 왕비-참고로 구스타프 아돌프의 계모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젊으시다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2차 세계대전때 칼 에두아르트는 독일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는데, 이때 그는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살해하는데 관여했으며,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데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 적십자사에 대해서 "유대인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스실로 보내는 기관"이라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습니다.
의회 연설중인 카를 에두아르트
...
전쟁이 끝난후 그는 전범으로 체포됩니다. 영국 왕족이자 메리 왕비의 동생과 결혼했고, 남편이 영국군으로 일했던 카를 에두아르트의 누나 앨리스는 이 소식에 경악했고 동생을 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카를 에두아르트는 전범재판소에 섭니다. 그의 부인인 빅토리아 아델하이트는 남편을 옹호했으며, 남편은 나치가 무슨짓을 하는지 몰랐다고 변호합니다. 하지만 재판정에서 그에게 막대한 벌금을 부과합니다.
이때문에 그는 재산 전부를 내놨고, 파산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캐나다 총독이었을때 애쓰론 백작 부부
카를 에두아르트의 누나인 앨리스 공주는 평생 영국 왕족으로 영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메리 왕비의 남동생인 테크의 알렉산더와 결혼했는데, 1차대전때 왕가의 성을 바꾸고, 친척들의 성을 바꿀때 테크가 역시 캠브리지로 성을 바꾸었고, 알렉산더는 애쓰론 백작이 됩니다.
앨리스는 영국의 공주였기에 자신의 신분을 바꿀 필요는 없었습니다.
앨리스 공주는 평생 영국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왕족이었습니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손녀는 할아버지가 무척이나 다정하고 쓸쓸한 사람이었으며, 개와 늘 하께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침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독일에 왔을때 영국에서 가져온것은 오직 침대하나였고 그곳은 언제나 할아버지가 영국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를 에두아르트는 그곳에서 사망했죠.
헬레나 공작부인은 아들에게 늘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라"라고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알바니 공작의 레오폴드의 아들인 찰스 에드워드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카를 에두와르트가 되었고, 나치전범이었습니다.
카를 에두아르트
자료출처
1. Hitler's Favourite Royal (Channel 4, 2008)
2. 위키 피디어
사진 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위키의 원 사진출처는 독일 연방 문서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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