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그리스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1세의자녀들

엘아라 2010. 3. 11. 19:12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한 그리스는 군주국이 되라는 강대국들의 압력을 받습니다. 그리고 선택된 왕이 바이에른의 오토 였죠. 오톤이라는 이름으로 20여년간 그리스를 통치했으나 결국 국민에 의해 물러났습니다. 그뒤로 다른 국왕을 뽑으라는 압력을 받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에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중 하나였던 영국의 왕자를 국왕으로 선출하길 바랍니다. 오톤 국왕역시 그것을 바래서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앨프러드 왕자를 뽑길 바랬죠. 하지만 그리스 독립에 관여했던 나라들은 자기네 왕족들이 그리스 국왕이 되지 않는것에 합의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에 얽혀들어가는것을 싫어했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러시아를 싫어했던 이유와 비슷했을듯합니다. 불안정한 나라에서 왕가가 버티지 못할것이라고 여긴거죠. 실제로 그랬구요.--;;;)

 

 

 

게오르기오스1세 가족들

맨앞에 강아지 안고 있는 남자는 올가 왕비의 사촌이자 후에 사위가 되는 러시아의 파벨대공입니다.

[정정]1892년경이라고 위키에서 그러는데 그것도 좀 아닌듯합니다.

왜냐면 마리아 공주가 1876년생인데 마리아가 10살정도 돼보이지 않습니까..

아마 1880년대 후반정도로 여겨지네요

 

두 아들과 두 딸과 함께 있는 게오르기오스1세 부부

아마 둘째인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덴마크에 있을때인듯합니다.

앞의 둘은 올가 왕비와 마리아 공주

뒤에는 게오르기오스1세, 알렉산드라 공주, 아마도 니콜라오스 왕자, 콘스탄티노스 왕태자

 

 

결국 그리스의 국민들이 택한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의 며느리인 알렉산드라의 동생인 덴마크의 빌헬름왕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로 와서 게오르기오스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50여년간 그리스를통치했습니다. (앞쪽 제포스트를 참조해주세요.) 게오르기오스1세는 러시아의 니콜라이1세의 손녀였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과 결혼했습니다. 둘사이에는 모두 여덟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럼 이 자녀들을 살펴볼까요.

 

첫째는 그리스의 국왕이 되는 콘스탄티노스1세입니다.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1세

Constantine I

(Greek:Κωνσταντῖνος Αʹ, Βασιλεὺς τῶν Ἑλλήνων , Konstantínos Αʹ, Vasiléfs ton Ellínon;)

( 2 August [O.S. 21 July] 1868 – 11 January 1923 )

 

콘스탄티노스1세는 그리스에서 태어났고, 정교회신앙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 국민이 원하던 국왕이었습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인 독일의 조피와 결혼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 대해서 "영리한편은 아니지만 건강하고 착하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노스는 부인이 독일인이었기에 언제나 그리스 정부의 비난대상이 되었고, 혼란스러운 그리스 정치와 언론의 과장된 체스쳐에 진절머리를 냈다고 합니다.

1890년대 그리스의 무모한 터키 침공은 크나큰 패배로 돌아왔고, 패전 지휘관이던 콘스탄티노스의 인기는 엄청나게 떨어졌습니다. (이때 영국과 러시아의 간섭으로 그리스는 터키에 점령당하는것을 피할수 있었지만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했고, 국왕은 퇴위까지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국왕의 암살시도가 도리어 국민들이 국왕중심으로 모일수있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909년 쿠데타가 발생했을때 그와 부인인 조피는 프랑스로 떠나야했고 스캔들의 주인공인 장남 게오르기오스는 외가인 독일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발칸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군인으로 복직했고 이전 전쟁과는 달리 승전장군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습니다.

발칸전쟁직후, 아버지 게오르기오스1세가 사망하고 그가 즉위했을때, 그리스 국민들의 콘스탄티노스1세의 즉위를 매우 환영했습니다. 그는 발칸전쟁의 영웅이었으며, 그리스에서 태어난 정교회 신자였을뿐만 아니라 독일인이긴 했지만 소피아라는 이름의 부인이 있었죠. 그리스에는 "콘스탄티노스가 소피아와 공동통치할때 그리스의 번영이 온다."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것이 그가 훌륭한 국왕으로 그리스를 번영시킬 인물이라고 말하는것이나 다름없었죠.

이런 멋진 희망은 1차대전때 산산히 부서집니다. 발칸전쟁때 게오르기오스1세와 베니젤로스가 힘을 함쳐서 전쟁을 지지한것과 달리 콘스탄티노스1세는 1차대전때 참전하는것을 거부합니다. 그는 그리스가 중립국으로 전쟁에 관여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했죠. 이런 생각은 왜 이익이 되지 않는 전쟁에 참전해서 국민들을 희생하냐는 생각이 깔려있었습니다만, 처남의 나라인 독일이 승전할경우 역시 생각한것일겁니다. 하지만 베니젤로스의 입장은 달랐죠. 그는 그리스가 연합국으로 전쟁에 참여해서 승전국이 되어 전후에 논의될 전후협상에서 이익을 챙기길 바랬습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베니젤로스를 지지했고, 아테네에 프랑스 군이 포격할 지경에 이릅니다. 콘스탄티노스1세는 결국 아들에게 양위하고 망명하기로 결정합니다.

콘스탄티노스1세의 큰아들인 게오르기오스 왕태자가 다음 국왕이 되어야했지만 그는 독일에서 교육받았기에 양위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래서 둘째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왕실가족들 역시 국왕과 함게 망명을 떠나야했죠.

콘스탄티노스1세의 망명 생활은 1차대전이 끝난후까지 지속됩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망명생활이 끝나죠.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사고로 사망합니다. 베니젤로스는 콘스탄티노스1세가 돌아오는것을 반대했지만, 국민투표에서 졌고, 콘스탄티노스는 다시 복위합니다.

그의 복위는 얼마 지속되지 못합니다. 1차대전의 승리는 베니젤로스와 다른 많은 그리스 인들이 터키의 속박에서 벗어날 기회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소아시아지역을 침공하죠. 콘스탄티노스가 복위했을때는 이 소아시아 침공이 시작된 뒤였습니다. 문제는 이 전쟁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는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 군인들이 전사했으며, 소아시아의 난민들이 그리스로 밀려왔죠. 이 침공의 실패로 그때까지 얻었던 수많은 영토(올림포스산을 포함)를 다시 터키에 뺏깁니다. 전쟁의 실패때문에 콘스탄티노스1세는 다시 아들인 게오르기오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해야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콘스탄티노스1세는 두번째 퇴위이후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집니다. 그리고 망명지인 시칠리에서 사망합니다.

 

 

콘스탄티노스1세와 가족들

막내인 예카테리니 공주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왕가는 늦둥이가 유행인듯해요..언제 한판 정리를...) 

 

둘째는 게오르기오스왕자입니다.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왕자

George of Greece and Denmark

(Greek: Πρίγκιπας Γεώργιος)

( 24 June 1869 – 25 November 1957)

 

 

게오르기오스1세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게오르기오스입니다. 게오르기오스1세는 아들을 해군으로 교육시키길 바랬고, 고국인 덴마크로 보냅니다. 게오르기오스 왕자의 숙부였던 발데마르 왕자가 덴마크 해군으로 복무했기때문에 그리스 국왕은 아들을 동생에게 맡겼고, 이렇게 운명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0-;;;;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젊은시절 크레타의 총독이 됩니다 크레타 주민들은 터키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기에 자주 터키에 대항했고, 이에 강대국들과 터키는 크레타 총독으로 그리스 국왕의 아들인 게오르기오스 왕자를 지명하죠. 하지만 게오르기오스 왕자의 존재는 크레타가 터키에서 독립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여긴 베니젤로스는 그의 축출운동을 펼칩니다. 결국 게오르기오스는 크레타 총독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그리스 정치에 대해서는 진절머리치며 관여하지 않습니다.

한편 니콜라이2세가 황태자시절 일본을 방문할때 게오르기오스왕자가 동행했습니다. 그때 유명한 오츠사건이 일어납니다.(...니콜라이2세 암살 시도사건입니다...) 이때 사촌인 니콜라이2세를 구한것은 게오르기오스 왕자였지만, 암살시도가 게오르기오스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오해가 가족들사이에 퍼졌기에 혼자 맘고생했다고 합니다.

게오르기오스 왕자는 당시 유럽 최고의 상속녀중 한명이었던 마리 보나파르트를 만납니다. 둘은 결혼하기로 결정합니다만 후에 마리는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나를 깨닫죠.

게오르기오스 왕자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숙부인 발데마르 왕자를 따랐습니다. 문제는 둘의 관계가 단순한 숙부-조카 관계를 넘어선것이라는것이었죠. 게오르기오스와 발데마르의 관계는 프라토닉한 관계였지만 유럽 왕실에서 구설수에 오르내릴만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휴고 비커스의 글에서는 게오르기오스 왕자를 "Not a lady's man"이라고 부릅니다. 전 발데마르왕자와 게오르기오스 왕자를 묶어서 "프랑스의 두 마리를 괴롭힌 숙질간"이라고 부르고요.- 발데마르 왕자의 부인은 오를레앙의 마리였죠. 마리 보나파르트와 함께 둘다 프랑스 사람이라죠.)

 

 

게오르기오스 왕자비

마리 보나파르트 공녀

마리 보나파르트에 대해서는 제가 쓴 글 "유럽왕족과 나폴레옹....5.마리보나파르트 (http://blog.daum.net/elara1020/8464104) "를 참조해주세요. 

 

 

셋째는 딸인 알렉산드라입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드라 공주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

Grand Duchess Alexandra Georgievna of Russia (Александра Георгиевна),

 Princess Alexandra of Greece and Denmark

(Greek: Πριγκίπισσα Αλεξάνδρ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Δανίας)

(30 August 1870 – 24 September 1891

 

알렉산드라 공주에 대해서는 제 글인 "불운했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여대공들 (http://blog.daum.net/elara1020/7203703) 를 참조해주세요"

 

 

넷째는 니콜라오스 왕자입니다.

 

 

 

 

그리스의 니콜라오스 왕자

Prince Nicholas of Greece and Denmark

(22 January 1872 – 8 February 1938)

안고 있는 아이는 딸 올가입니다.

 

 

니콜라오스 왕자는 게오르기오스1세의 셋째아들이었습니다. 젊은시절부터 예술쪽으로 재능이 있었는데 그림을 잘 그렸고 극본을 쓰는등의 문학적 재능도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나 망명시절 그림을 배워서 그 그림을 팔아서 가족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었다고 합니다.

니콜라오스 왕자는 자신의 육촌이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대공의 딸인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합니다. 옐레나 여대공은 한때 바덴 대공가의 후계자가 되는 막시밀리안과 약혼했다가 파혼합니다.(막시밀리안이 일방적으로 파혼합니다.) 늘 자존심 강하던 미헨대공비는 열받았고 딸을 왕위계승자와 결혼시키려합니다만, 별 소용없었고 옐레나는 어머니 올가 왕비를 따라 자주 러시아에 오던 니콜라오스 왕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러시아 황제의 손녀이자 러시아의 여대공으로 다른 왕국의 공주들보다 자신의 신분이 더 높다고 생각했던 엘렌은 자신의 동서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시집식구들과 가끔 마찰을 빚었습니다만, 남편과는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니콜라오스 왕자의 막내딸인 마리나는 후에 조지5세의 아들인 켄트공작 조지와 결혼합니다.

 

 

니콜라오스 왕자 가족 

 

 

다섯째는 마리아 공주입니다.

 

 

 

그리스의 마리아 공주

러시아의 마리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

Maria or Marie Georgievna,

Princess of Greece and Denmark

(Greek: Πριγκίπισσα Μαρί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Δανίας)

 (3 March 1876 – 14 December 1940),

 

마리아 공주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대공비들...2.니콜라이1세의 며느리들과 손주며느리들 (http://blog.daum.net/elara1020/8464070) "을 참조해주세요

 

여섯째는 올가 공주로 태어난지 석달만에 사망합니다.

 

일곱째는 안드레아스 왕자입니다.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

Prince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20 January/2 February 1882 (o.s./n.s.) – 3 December 1944)

 

...젊을때 사진은 필립공이랑 다른데 어린시절이랑 나이든 모습은 필립공이 아부지를 굉장히 많이 닮았습니다. 젊은 시절 모습은 안드레아스 왕자가 더 잘생겼다는 생각을 한다죠.

 

안드레아스 왕자는 게오르기오스1세의 넷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군인이 되는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가정교사는 다른 형제들이 휴일날 놀때도 훈련을 시켰습니다.

형제들중 자신이 그리스인이라는 자각이 제일 강했는데, 부모와 대화할때 형제들이 대부분 영어로 대화한것에 반해서 그는 그리스어로만 부모와 대화를 했습니다 (물론 영어,독일어,러시아어,덴마크어,프랑스어를 했다고 합니다.)

젊은 소위였던 그는 고모인 알렉산드라 왕비를 만나러 영국에 갔다가 아름다운 왕족을 만나서 사랑에 빠집니다. 바로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였죠.

앨리스는 남편인 안드레아스 왕자에 대해 "다른 군인들처럼 승진하길 바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발칸전쟁에 참가했으며, 이후 1차대전때 다른 형제들과 망명합니다. 군인으로 자란 그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망명생활에 무척이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침공이 실패로 돌아가고, 콘스탄티노스1세가 망명할때 안드레아스 왕자 역시 소아시아 침공의 책임자로 군사법정에 섭니다. 그리스 정치상황이 극한에 치달아서 정치가들이 총살당하자, 이에 놀란 주변국 사람들과 베니젤로스는 안드레아스 왕자의 목숨을 살려주는데 합의합니다. (조지5세는 베니젤로스에게 사람을 보냈고, 베니젤로스는 안드레아스 왕자를 살리겠다고 확답을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망명생활이 지속되면서 안드레아스 왕자는 좌절감에 빠집니다. 그는 점점 술에 의존했고, 부인인 앨리스가 아프자 부인을 요양원에 넣는데 동의했고, 어린 아들을 장모에게 맡기죠. (루이즈는 언니보다 형부를 더 걱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그리스로 다시 돌아가지만 정치적 민감성때문에 그냥 니스에서 "될대로 되라"는 식의 삶을 영위합니다. 병에서 회복한 앨리스와는 우호적으로 별거햇으며 그는 니스에서 "여성친구"와 동거했습니다.

 

사후 안드레아스 왕자의 빚은 가족들에게 문제가 되었는데, 앨리스는 아버지의 빚을 오래도록 갚았던 아들 필립공에게 무척이나 미안해했다고 합니다. (필립공은 아버지를 무척이나 존경하는듯하더라구요. 그게 보니까 장모에게 맡기긴했어도 안드레아스 왕자가 필립공을 자주 찾아본듯하더라구요. 휴가때마다 아들이랑 자주 만나고 그러더라구요. )

 

 

안드레아스 왕자 가족

이 사진이 가족들이 다 모여서 찍은 마지막 사진입니다.

이후 앨리스는 아파서 요양원으로 갔고, 필립공은 외가와 누나들 집을 왔다갔다 거렸고, 딸들은 다 결혼했습니다. 이후 가족이 다시 모인것은 앨리스의 셋째딸인 세실(그리스식으로는 케킬리아라고 읽는다고 합니다.)의 장례식때였습니다.

세실의 언니 마르가리타는 세실의 장례식때 "세실이 죽어서 가족들을 모이게 했다"라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이사진을 보면 늘 느끼는것이 딸들보다 더 예쁜 앨리스...입니다.

 

막내는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입니다. 

 

 

 

 

그리스의 크리스토포로스 왕자

Prince Christopher of Greece and Denmark

(10 August 1888 – 21 January 1940)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는 형들과 나이차이가 좀 있었습니다.그리고 그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 그리스 왕가는 혼란했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그다지 큰 영향을 하거나, 군에 열심히 투신할만한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1920년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는 미국의 부유한 여성인 낸시 리즈와 결혼합니다. 낸시 리즈는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전 남편으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낸시 리즈는 후에 공식적으로는 그리스의 아나스타샤 왕자비 라고 불립니다.) 이 재산은 망명중인 그리스 왕가에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습니다.

암으로 부인이 사망한후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는 후에 파리백작(오를레앙가의 후계자가 쓰는 칭호)의 딸인 오를레앙의 프랑수아즈와 재혼합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라면서도 그리스 정치에 관여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는 신지학에 심취했고, 형수인 앨리스 왕자비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첫번째 결혼식때

가운데는 어머니 올가 왕비이고 왼쪽이 부인인 낸시 리즈(아나스타샤 왕자비)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