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0-;;; 쓰다보니 두개가 되었습니다.
정부들과 그 후손들...(61)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 : 루이 14세와 마담 드 몽테스팡의 딸(두번째)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
마드무아젤 드 낭트
콩데 공비
Louise Françoise de Bourbon
(1 June 1673 – 16 June 1743)
1691년 루이즈의 어머니인 마담 드 몽테스팡이 궁정을 떠나게 되었을때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수녀원으로 은퇴한 어머니를 자주 찾아갔었으며 그녀는 어머니와 제일 가까운 자녀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마담 드 멩트농보다는 어머니와 더 가까운 사이였을듯합니다. 마담 드 멩트농이 비록 마담 드 몽테스팡의 아이들에게 잘했지만, 사실 마담 드 멩트농이 편애한 아이는 멘공작이었으며 다른 아이들은 신경을 덜 썼었다고 합니다.
마담 드 몽테스팡이 죽었을때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매우 슬퍼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인 루이 14세가 궁정에서 마담 드 몽테스팡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금지했기에 마담 드 몽테스팡의 자녀들은 상복을 입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이 없었던 어머니의 죽음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멘 공작과 달리 루이즈 프랑수아즈와 그녀의 동생들(오를레앙 공작부인과 툴루즈 백작)은 어머니를 애도하기 위해 궁정의 유흥에 한동안 참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 마담 드 몽테스팡
1692년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동생인 마드무아젤 드 블루아인 프랑수아즈 마리는 숙부인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샤르트르 공작 필리프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것은 콩데의 후계자의 아내인 루이즈 프랑수아즈보다 프랑수아즈 마리의 궁정내 지위가 더 높아지는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샤르트르 공작이 왕위계승권이 더 높음) 심지어 프랑수아즈 마리는 루이즈 프랑수아즈보다 두배나 많은 지참금을 받았기에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여동생에 대해서 매우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후에 오래도록 여동생인 프랑수아즈 마리에 대해 루이즈 프랑수아즈가 라이벌 의식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콩데 공비의 여동생
프랑수아즈 마리
오를레앙 공작부인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매우 활달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으며 이런 그녀는 궁정내에 주목을 받는 여성이었죠. 이런 상황은 루이즈 프랑수아즈가 궁정내에서 연애질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 대상은 잘생겼던 콩티 공 프랑수아 루이였습니다. 그는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이복 언니인 마리 안의 시동생이자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시누이였던 마리 테레즈 드 부르봉의 남편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때문에 많은 이들이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넷째딸이자 다섯째 아이인 마리 안이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콩티공의 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남편이 이 사실을 알았을때 그는 대놓고 화를 내지는 못했는데 국왕인 장인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후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남편과 화해했는데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넷을 더 낳았고 결국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모두 아홉아이를 낳아다고 합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
1709년 시아버지인 콩데 공이 사망한뒤 그녀의 남편이 콩데 공이 된뒤 그녀는 공데공비가 됩니다. 하지만 왕실의 제1분가의 수장 자리는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 제부이자 사촌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이 되었으며, 이 상황은 다시 한번 루이즈 프랑수아즈가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부인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3년후인 1710년 남편인 콩데공 루이가 사망했고 그녀의 아들이 콩데공이 됩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아들
콩데 공 루이 앙리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이복오빠인 도팽과 매우 친했으며 이때문에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이복오빠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지위도 올라갈것이라 여겼었죠. 하지만 이복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조카인 부르고뉴 공작이 도팽이 되면서 새로 도핀느가 된 조카며느리인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와 문제가 생깁니다. 마리 아델라이드는 이제 궁정에서 제일 높은 신분의 여성(하지만 사실상은 2인자)였으며 실질적 왕비로 군림하던 마담 드 멩트농이 예뻐했기에 루이즈 프랑수아즈 같은 "사생아 고모"들에 대해서 거만하게 굴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루이즈 프랑수아즈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새 도핀느를 싫어하게 된 원인이 되었죠.
후에 루이 15세가 될 아들과 함께 있는 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보이
아버지가 죽고 조카의 아들인 루이 15세가 즉위하고 오빠인 멘공작이 실각하고 제부인 오를레앙 공작이 섭정이 되면서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부인에게 느끼던 라이벌 의식이 더 커지게 됩니다. 이제자신의 여동생은 왕비가 없는 궁정에서 제일 높은 신분이었기 때문이었죠. 이시기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파리에 자신의 집인 "부르봉 궁"을 짓게 됩니다. 이곳에서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둘째딸인 콩티 공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는데 콩티 공비의 연애질이 발각된뒤 콩티 공(...루이즈 프랑수아즈가 연애질 했던 남자의 아들)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콩티 공비는 파리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한 동안 남편에게 돌아가길 거부했다고 합니다.
1720년대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라세 후작과 연인관계가 되었고 라세후작은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파리 집인 "부르봉 궁"옆에 자신의 집인 "호텔 드 라세"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건물은 연결되었고 연인들은 서로의 집을 오갔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파리에 있는 그녀의 집근처로 그녀의 형제 자매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튈르리 궁 근처에 있었던 그녀의 집 근처로 언니인 콩티 공비,오빠인 멘공작이 살았고 역시나 여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부인 역시 튈르리궁 근처의 오를레앙 가문의 집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또 동생인 툴루즈 백작 역시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죠.
루이즈 프랑수아즈가 지은 "부르봉 궁"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1743년까지 살았으며 그녀는 왕가의 어른으로 여러가지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1731년에는 루이 15세의 장남인 도팽의 세례식때 도팽의 대모가 되어주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루이즈 프랑수아즈는 모두 아홉아이를 낳았고 이 아홉아이들은 모두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중 둘째딸인 루이즈 엘리자베트는 콩티 공과 결혼했고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딸인 루이즈 앙리에트는 오를레앙 공작과 결혼했고 이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가 바로 "평등공"으로 알려지게 되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입니다.
루이즈 앙리에트 드 부르봉
루이즈 프랑수아즈의 외손녀
.....그녀는 말도 못하게 연애질이 심해서 그녀의 시아버지인 오를레앙 공작이 한동안 아이들을 손자로 인정 안할정도였다고 합니다. 필리프 에갈리테는 혁명후에 자신의 친아버지는 오를레앙 공작이 아니라 어머니가 바람핀 마부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아서 모두들 안 믿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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