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 공주,왕비 그리고 국회의원: 가야트리 데비...(10) 국회의원

엘아라 2015. 1. 1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다 끝나갑니다만...

끝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난감합니다.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끝내야겠습니다..ㅎㅎㅎㅎ


[새해특집] 공주,왕비 그리고 국회의원: 가야트리 데비...(10) 국회의원


가야트리 데비가 야당인 스와탄트라 당에 가입한것은 1960년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전의 인도 중앙정부와 국민 회의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겼었죠. 남편인 만 싱 2세는 이전 군주였기에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한다고 여겼었지만 이런 남편을 홀대하고 고립시키려는 중앙 정부에 대해서 가야트리 데비는 심한 반발감을 느낌니다. 그리고 야당인 스와탄트라 당에 가입하죠.


문제는 그녀는 즉흥적으로 바로 가입해버렸는데 그때가 영국 여왕의 국빈 방문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이푸르를 와달라고 부탁했고 여왕은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자이푸르에 오는 것이었는데 이런 중대한 사건을 터트리는 것은 예의가 어긋나는 일이기도 했었죠. 어쨌든 엘리자베스 여왕이 돌아갈때까지 입당 사실은 비밀로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런 그녀의 행동은 즉흥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 계산된것이 아니었는데 이때문에 가족이나 자이푸르 국민들 모두가 부담스러워했다고 합니다. 혹시나 마하라자의 가족들이 정치적 보복을 당하거나 신변에 위협을 겪을 것을 두려워했었던 것이죠.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와 함께 있는 만 싱 2세

http://daily.indianroots.com/maharanis-of-india/


가야트리 데비는 1962년 인도 총선에 출마하게 됩니다. 그녀는 이런 거창한 것을 원치 않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아내에게 출마를 권유합니다. 그리고 만 싱 2세의 다른 아들들 역시 출마하게 되죠. 장남은 군인이었기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다른 두 아들은 지역에 출마하게 됩니다. 선거운동을 통해서 가야트리 데비는 선거라는 개념 자체를 처음으로 이해했었던듯합니다. 그리고 선거 유세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자이푸르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이지만 손님을 맞을땐 친절하고 자존심도 강하며 삶을 인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또 그들의 삶에 중요한 문제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제대로 해결되고 있지 않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고 합니다.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이런 국민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옛 왕정체제때 처럼 다 해결해주는 그런것일지도 모르고 이들을 만족시킬수 없을지도 모른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가야트리 데비

http://hurlinghampolo.com/backissues/winter_09/html/Hurlingham_e-Mag/page_22.html


마지막 유세에서 가야트리 데비는 그리 멋진 연설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옛 군주였던 그녀의 남편은 달랐죠. 아내의 유세를 지원하기 위해 나온 만 싱 2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결국 가야트리 데비와 만 싱 2세의 두아들 모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특히 가야트리 데비는 경쟁 후보보다 무려 175,000표 차이로 승리를 거뒀었죠. 이렇게 가야트리 데비는 국회의원으로써의 삶을 시작합니다.


야당 의원으로써 가야트리 데비는 새로운 삶을 배웠고 이제 국회의원으로 해야하는 많은 일들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여전히 마하라니였으며 이런 두가지 직책은 여러가지 문제를 맞닥들이게 합니다. 이를테면 재클린 캐네디가 개인적으로 방문했을때 조차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될수 있다면서 여러가지 제약이 따르기도 했었죠. 그리고 인도가 아시아의 강대국이 되지 못하는 상황도 목격하게 됩니다. 중국-인도간 전쟁에서 나약하게 영토를 뺏기는 모습에 분개하기도 했었죠.



딸 인디라 간디와 함께 있는 네루


네루가 사망하면서 만 싱 2세는 에스파냐 대사직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정치적 이유때문이기도 했다고 여겨졌는데 가족들은 만 싱 2세가 다른 일을 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합니다. 가야트리 데비는 야당 국회의원으로써의 의무와 남편을 따라가야하는 아내의 의무를 갈등했는데 결국 이 문제로 수상까지 면담했습니다. 그리고 두개의 일을 병행하게 되죠. 국회가 열려있는 동안은 인도에 있었고 국회가 폐회되면 에스파냐로 가서 남편과 함께 머물렀었습니다.


두번째 국회의원 선거철이 되었을땐 가야트리 데비는 처음보다 좀더 정치적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그녀의 당은 이제 정치적 권력을 얻는데 더 집중하고 있었죠. 만 싱 2세의 아들들은 더이상 정치를 하려하지 않았으며 남편은 에스파냐에 있었죠. 결국 가야트리 데비는 힘든 싸움을 시작했고 야당 연합이 겨우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의회가 열리지 않았는데 이동안 야당의원들을 회유해서 국민회의쪽으로 가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죠. 이런 사태를 막으려고 여러 시도를 했으며 사람들은 항의 집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끔직한 유혈사태가 일어나죠. 가야트리 데비는 대통령을 만나러 갔었는데 중간에 이 소식을 듣고 바로 돌아가려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만 싱 2세가 그러면 군중들이 더 많이 모여서 더 큰 사고가 일어날수 있다고 말렸다고 합니다.그리고 결국 사태가 국민회의쪽으로 유리하게 진행되자 가야트리 데비는 너무나 큰 무기력함을 느꼈고 에스파냐에 있는 남편곁에 가있었다고 합니다.



가야트리 데비와 만 싱 2세


자료출처

1.내사랑 인도(가야트리데비/한국번역연구원,파라북스.2006)

2.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1.위키 미디어 커먼스

2.http://daily.indianroots.com/maharanis-of-india/

3.http://hurlinghampolo.com/backissues/winter_09/html/Hurlingham_e-Mag/page_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