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잉글랜드의 여성왕위 계승자들...(13) 빅토리아 여왕 : 첫번째 가족 배경과 어린시절

엘아라 2011. 8. 3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끝이 보이는군요.

빅토리아 여왕빼고는 현 여왕님밖에 없는데 아시다시피 제가 살아있는 왕족에게는 그닥 관심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현 여왕님은 할까말까 고민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너무너무너무 이야기꺼리가 많기 때문에 고민이라죠.

제가 예전에 도서관에서 영국 역사 파트에 눌러 앉아서 책을 봤는데 대부분 빅토리아 여왕과 관련된 책이 많더군요. 하여튼 여왕전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결국 파트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아마 지금 생각으로는 3개로 나눌까합니다. 어린시절이랑 남편이 죽기 전까지 그리고 남편이 죽은후 이렇게 말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인 앨버트공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남편에게 순종적인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여왕은 성격이 불같았고, 잔소리가 하늘을 찔렀기에 앨버트공은 서재로 도망가서 문을 잠그고 아내가 화를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물론 여왕은 그런 남편을 따라다니면서 막 말을 퍼부어댔다고 합니다.

 

여왕이 나이가 들면서 남편에게 점점 의지하기는 했지만 이런 성격이 고쳐진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좋은 남편 만났을뿐...입니다.--;;;

 

잉글랜드의 여성왕위 계승자들...(13) 빅토리아 여왕 : 첫번째 가족 배경과 어린시절

 

영국의 조지 3세는 열다섯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중 아들만 아홉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은 일곱명이었죠. 하지만 불행히도 왕위계승자 숫자는 엄청나게 적었습니다. 아들들은 많았지만 이 아들들이 엄청 속을 썩였고, 그 결과 조지 3세는 아들 숫자에 비해 손자 손녀의 숫자가 엄청나게 적었습니다.

 

 

조지 3세

그는 나이가 들면서 정신상태가 온전치 않습니다. 이때문에 통치는 큰아들인 웨일즈공이 했으며 보통 "섭정공"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영국을 "섭정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의 광기는 아마도 "포르피린증"때문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스코틀랜드 왕가의 혈통에서 온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조지 3세의 장남인 웨일즈 공(후에 조지 4세)는 부인 캐롤라인과 별거중이었으며 유일한 적자는 딸인 샬럿밖에 없었죠. 둘째아들인 요크 공작 프레드릭은 자녀없이 부인과 별거중이었고 이때문에 적자가 태어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셋째부터 나머지 아들들은 정식부인이 없이 정부와 동거하거나 아니면 왕족이 아닌 여성과 비밀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다섯째 아들이었던 어니스트 아우구스트는 사촌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레데리케와 결혼했지만, 프레데리케는 두번이나 결혼했으며 두번째 결혼은 스캔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문에 어니스트 아우구스트의 어머니인 샬럿 왕비는 며느리인 프레데리케를 만나는것을 거부할정도였죠. (프레데리케는 샬럿 왕비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왕실에서는 적자들이 없었기에 왕위계승자의 문제는 심각한것이었죠. 하지만 그래도 웨일즈 공의 딸인 샬럿이 있었기에 그나마 안심할수 있었죠.

 

 

웨일즈의 샬럿

조지 4세의 외동딸

그녀는 영국에서 인기 없던 하노버 왕가 출신중 인기 있던 몇 안되는 왕족중 하나였습니다.

어린시절부터 부모의 불화로 불행했으며 이런 불행한 어린 공주에 대해서 영국 국민들은 안타까워했으며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샬럿의 편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1817년 웨일즈의 샬럿이 죽고 나면서 시작됩니다. 샬럿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게 되자, 영국 의회는 왕위계승자들에 대한 고민이 깊어집니다. 샬럿외에는 다음대 왕위계승자가 없었기 때문이죠. 결국 의회는  미혼으로 정부들과 살고 있던 왕자들에게 부채탕감을 미끼로 "왕실에 걸맞는 여성"과 결혼하게 합니다.

이때 결혼한 왕자들이 조지 3세의 셋째 아들인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 일곱째아들인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였습니다. 클라렌스 공작의 경우 여배우 도로시 조던과 살면서 무려 10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도로시조던과 헤어지고 작센-마이닝겐의 아델라이드와 결혼하죠. 아델라이드는 클라렌스 공작보다 무려 27살이나 어렸는데, 클라렌스 공작과 도로시 조던의 장남인 조지 피츠클라렌스와는 겨우 두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델라이드는 윌리엄에게 과분할 정도의 여성으로 남편의 사생아 아이들을 무척이나 챙겼다고 합니다.) 켄트 공작 역시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와 결혼합니다. 빅토리아의 동생인 레오폴트는 웨일즈의 샬럿 공주의 남편이기도 했습니다.일곱째 아들인 캠브리지 공작은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와 결혼합니다.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과 그의 부인 작센-마이닝겐의 아델라이드

 

켄트 공작 에드워드와 그의 부인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와 그의 부인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

 

 

이렇게 노력한 결과 1819년에 영국 왕실에는 수많은 계승자들이 태어납니다.

먼저 클라렌스 공작의 딸인 샬럿이 태어나고 다음으로는 캠브리지 공작의 아들인 조지가 태어났고 그뒤로는 켄트 공작의 딸인 빅토리아가 태어났고 그후에는 컴벌랜드 공작의 아들인 조지가 태어납니다.클라렌스 공작의 딸인 샬럿은 태어나서 얼마 살지 못하죠. 하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켄트 공작부인과 딸 빅토리아

 

1820년 켄트공작 에드워드는 딸이 태어난지 일년도 되지 않아서 사망합니다. 그가 죽은 6일후 영국의 조지 3세도 사망하죠. 

조지 3세가 사망하고 조지 4세가 즉위할 무렵 제 1왕위계승자는 조지 3세의 동생인 요크 공작 프레드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태어날 가능성도 없었죠. 제2왕위계승자는 역시 조지 4세의 동생인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이었습니다. 그의 딸인 샬럿은 죽긴했지만 아내인 아델라이드가 또 임신중이었죠. 비록 그가 나이가 많아서 자녀를 많이 낳는것은 어려워보였습니다만, 어쨌든 아델라이드의 아이가 왕위계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제3왕위계승자는 바로 켄트공작의 딸인 빅토리아였죠. 비록 아버지를 잃긴 했지만 빅토리아는 꽤나 높은 서열의 왕위계승자였습니다. 그리고 제 4왕위계승자는 조지 3세의 동생인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였으며 제 5왕위계승자는 그의 아들인 조지였죠. 그리고 제 6왕위계승자는 조지3세의 동생인 서섹스 공작 아우구스트 프레드릭이었으나 그는 왕실에서 인정받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그의 아들은 왕위계승자가 될수 없었죠. 제 7왕위계승자는 조지 3세의 동생인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였으며 제 8왕위계승자는 캠브리지 공작의 아들인 조지였죠.

 

 

영국의 조지 4세

빅토리아 여왕의 백부

 

조지 4세때 클라렌스 공작의 딸이 태어납니다. 그 아이가 왕위계승자가 될것이 확실했으며 아이의 이름은 영국 여왕의 이름인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하지만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그리고 조지 3세의 동생이자 제1왕위계승자였던 요크 공작 역시 형보다 먼저 죽죠.

그결과 조지 3세가 죽고 클라렌스 공작이 윌리엄 4세로 즉위했을때, 켄트 공작의 딸이자 윌리엄 4세의 조카인 빅토리아는 제1왕위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윌리엄 4세

빅토리아 여왕의 백부

 

 

 빅토리아의 어린시절은 매우 불행햇던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켄트 공작부인은 영어를 거의 못했고 영국에 친구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남편이 죽은후 그녀는 영국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았고 고향인 독일로 돌아가고 싶어했죠. 하지만 딸 빅토리아는 중요한 왕위계승자였으며 이런 왕위계승자가 영국의 밖에서 사는것은 용납받을수 없었습니다. 결국 남편도 없고 친구도 거의 없던 켄트 공작부인은 딸을 위해 영국에 머물러야했죠. 이런 켄트 공작부인이 기댔던 인물은 바로 켄트 공작이 고용했던 존 콘로이였습니다. 그는 켄트 공작부인에게 매우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동시대의 많은 이들이 존 콘로이와 켄트 공작부인이 연인관계였으리라 추정했습니다. 둘의 관계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지만 적어도 둘의 관계가 평범한 "여주인-시종"관계 이상이었던것은 분명합니다.

 

 

존 콘로이

켄트 공작부인의 비서

그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후에도 돈문제로 여왕의 궁정에서 스캔들을 만듭니다.

켄트 공작부인은 딸인 여왕의 편이 아니라 존 콘로이의 편을 들어서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여왕은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외삼촌의 충고를 받아들여 연금을 주고 은퇴시키는것으로 그의 역할을 끝내게 했습니다.

 

어린시절 빅토리아는 어머니 켄트공작부인의 과보호와 빅토리아가 여왕이 된후에도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존 콘로이의 야심에 휘둘렸습니다. 켄트공작부인과 존 콘로이는 "켄징턴 시스템"이라는 것을 고안해냅니다. 이것은 빅토리아를 보호하는 동시에 고립시키는 것이었죠. 빅토리아는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할만한 사람을 접촉할수 없었는데 특히 친구를 가질수 없었습니다. 놀이 대상으로는 존 콘로이의 자녀들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존 콘로이가 빅토리아가 여왕이 된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아래 두기 위한것이었죠. 이때문에 빅토리아는 백부인 윌리엄 4세나 좋아했던 백모인 아델라이드 왕비를 자주 만날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아델라이드 왕비는 이를 매우 슬퍼했고, 윌리엄 4세는 켄트 공작부인에게 매우 화냈다고 합니다.

또 빅토리아가 사고나 암살당할 수도 있었기에 늘 어른이 함께했으며 계단을 혼자 오르내릴수도 없었습니다. (계단을 오르내릴때 늘 어른이 함께 있었죠) 또 다 커서도 자신만의 침실을 가지고 있을수도 없었으며 어머니의 침실을 함께 써야했죠.

 

 

어린시절의 빅토리아 여왕

 

이런 억압된 생활은 빅토리아를 무척이나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으로 만듭니다. 빅토리아는 늘 존 콘로이와 어머니에 대항했으며 여러가지 문제에서 버텨야했습니다. 특히 켄트 공작부인은 빅토리아가 미성년으로 여왕이 될 경우 자신이 섭정이 되길 바랬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던 존 콘로이의 영향을 받은것이었죠. 존 콘로이는 빅토리아가 여왕이 된후 자신을 여왕의 개인비서로 임명하라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또 빅토리아가 성인이 되자, 켄트공작부인과 존 콘로이는 빅토리아에게 "아직 어려서 섭정이 필요하다"라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하기조차 했습니다. 켄트 공작부인과 존 콘로이를 못 마땅하게 여기던 윌리엄 4세는 켄트 공작부인 앞에서 대놓고 빅토리아가 성인이 된후까지 살아서 절대 켄트 공작부인이 섭정이 되는 꼴은 보지 않겠다고 말할정도였죠.

 

이런 존 콘로이와 켄트 공작부인에게 반대하는 사람중 한명이 빅토리아 여왕의 가정교사였던 레젠이었습니다. 그녀는 존 콘로이와 켄트 공작부인에게 빅토리아가 대항하는데 큰 힘이 되고 지지한 인물이었죠. 특히 그녀는 존 콘로이를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빅토리아는 어머니 켄트공작부인보다 가정교사인 레젠에게 더욱더 의존하게 되었죠.

 

 

레젠

빅토리아 여왕의 가정교사

여왕이 직접 그린것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후 켄트 공작부인보다 더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했었습니다.

 

존 콘로이의 야심에 대해 걱정을 표한 사람은 윌리엄 4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빅토리아가 좋아한 친척이자 평생 조언자로 여겼던 외삼촌인 벨기에의 레오폴1세 역시 존 콘로이의 영향력에 대해서 걱정했습니다. 그는 존 콘로이때문에 빅토리아가 왕위계승자로 훈련받지 못하는것을 걱정했죠.

 

즉위전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의 불행한 어린시절은 1837년 끝이 납니다. 빅토리아가 성인이 된지 한달정도후에 백부인 윌리엄 4세가 사망합니다. 빅토리아는 섭정없이 스스로 통치할수 있는 나이였죠. 빅토리아는 백부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가져온 사람들을 어머니 없이 홀로 맞습니다. 

 

이렇게 빅토리아는 여왕이 됩니다.

 

 

백부의 사망소식을 전해듣는 빅토리아 여왕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