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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72)모리엔의 아델라이드 : 루이 6세의 왕비

엘아라 2021. 12.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왜 삶이 우울할까요.

하여튼 우울합니다.ㅠ.ㅠ

덕분에 글쓰기가 안되네요..그냥 방구석에서 아무생각없이 드러누워있습니다.

이런 기분 참 오랫만...이라고하려니...매년 이랬던 기억이 있군요..쿨럭

 

프랑스의 왕비들...(72)모리엔의 아델라이드 : 루이 6세의 왕비

 

 

모리엔의 아델라이드

사보이의 아델라이드

Adelaide of Maurienne, also called Alix or Adele

(1092 – 18 November 1154) 

 

알릭스, 아델, 사보이의 아델라이드 등으로 알려진 모리엔의 아델라이드는 아마도 1092년 또는 1100-1101년 사이 정도에  사보이의 움베르토 2세와 그의 아내인 부르고뉴의 기젤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델라이드라는 이름은 증조할머니였던 수사의 아델라이드나 친척으로 예루살렘의  왕비였던 아델라이드 델 바스코의 이름에서 딴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수사의 아델라이드, 18세기 상상화

 

아델라이드의 아버지인 움베르토 2세는 사보이 백작으로 특히 그의 할머니는 토리노의 통치자였던 수사의 아델라이드였습니다. 수사의 아델라이드는 당대 강력한 영주이자 교황의 보호자였던 토스카나의 마틸다와 비견될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아델라이드는 아버지의 영지를 상속받은 상속녀였는데 마틸다와 달리 그녀는 황제쪽을 지지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델라이드는 세번결혼했었는데 세번째 남편인 사보이의 오돈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들을 낳았는데 아델라이드는 남편이 죽고 아들들이 뒤를 이었음에도 여지에 대한 통치권력을 놓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수사의 아델라이드의 둘째아들이었던 아메데오는 형이 죽은뒤 지위를 이어받았지만 어머니의 그늘에 완전히 가려진 인물이었으며, 아델라이드의 아버지 역시 어린시절 할머니인 아델라이드와 사촌의 남편이었던 몽벨리아르의 프리드리히가 통치했었다고 합니다. 이후 움베르토 2세는 할머니인 아델라이드가 죽은뒤 상속문제때문에 여러분쟁을 겪고 영지를 뺏기기도 했었습니다. 

 

사보이의 움베르토 2세, 후대 그림 그의 후손은 결국 사보이 공작가문-사르데냐 왕가-이탈리아 왕가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델라이드의 어머니인 부르고뉴의 기젤라는 부르고뉴 백작 기욤 1세의 딸이었으며 기젤라의 할머니는 바로 노르망디의 아델라이드로 공작 리샤르 2세의 딸이기도 했었습니다.  기젤라의 아버지인 기욤 1세는 부르고뉴 백작령에 대한 권리를 강화했었는데 특히 기젤라의 남자형제중 한명은 바로 교황 칼리스토 2세였으며 또다른 남자형제인 레이몽은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왕이었던 우라카와 결혼해서 그의 아들이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7세가 됩니다. 

 

부르고뉴의 기젤라(지젤),

 

아델라이드의 아버지인 움베르토 2세는 1103년 사망했으며 아델라이드의 어머니는 몽페라 후작과 재혼했었습니다. 영지는 아델라이드의 남자형제였던 아메데오 3세가 영지를 이어받았습니다만 미성년이었기에 후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델라이드는 1115년 프랑스의 국왕이었던 루이 6세와 결혼합니다. 아델라이드가 프랑스 국왕과 결혼할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가문이 중요한 대가문중 하나였을뿐만 아니라 외삼촌이 교황이었던 것 역시 중요하게 작용했을 듯합니다. 

결혼후 아델라이드는 루이 6세와의 사이에서 아홉명의 자녀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궁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 됩니다.  아델라이드는 중세 프랑스 왕비들중 가장 정치적 행사나 종교적 행사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여성이었으며 이것은 그녀가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루이 6세는 아델라이드에 대해서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것은 둘 사이에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을뿐만 아니라 아델라이드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루이 6세

 

1137년 루이 6세가 죽은뒤 아델라이드는 중세시대 과부가 된 여성들이 수도원으로 은퇴하던것과 달리 재혼하게 됩니다. 상대는 몽모렝시의 마티외 1세로 그는 이전에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딸인 알릭스 피츠로이와 결혼해서 헨리 1세의 호의를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뒤 루이 6세의 왕비이자 루이 7세의 모후였던 아델라이드와 재혼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몽모렝시의 마티외가 루이 7세의 통치 초기에 국왕의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델라이드는 재혼해서 궁정에 머무르면서 여전히 궁정 행사와 종교행사에 참석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아델라이드가 며느리인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맞부딪히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문화가 북부 지역과 문화가 다른 아키텐 지역 출신이었으며 이것은 프랑스 궁정내에서 왕비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게 보는 원인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선을 가진 인물중에는 시어머니인 아델라이드 역시 있었을 듯합니다.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결혼

 

아델라이드는 아들과 며느리가 헤어질때까지도 여전히 프랑스 궁정에 머물렀었습니다만 1153년 궁정에서 은퇴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두번째 남편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수녀원으로 은퇴한것은 아마도 루이 7세와의 관계가 나빠져서 궁정에서 은퇴해야하는 상황이었거나 아니면 병을 앓았을 가능성이 았어보입니다. 그리고 1154년 아델라이드는 사망합니다. 

 

아델라이드는 루이 6세와의 사이에서 아홉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중 둘째아들인 루이는 갑작스럽게 죽은 형 필리프를 대신해서 루이 7세가 되었습니다. 다른 아들인 로베르는 드뢰 백작 지위를 이어받았으며, 로베르의 아들인 피에르는 브르타뉴 공작령의 상속권을 가지고 있던 알릭스와 결혼했으며 이들의 후손은 브르타뉴 공작 지위를 이어갔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