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5)예브도키야 루키아노바 스트레쉬녜바 : 미하일 1세의 황후

엘아라 2016. 11. 1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하하...러시아 이름은 ㅠ.ㅠ

표트르 대제때까지 이 복잡한 이름들을 계속 읽고 있어야하다니 슬픕니다.

아 아니다..안나 여제때까지는 읽어야하는구나..ㅠ.ㅠ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5)예브도키야 루키아노바 스트레쉬녜바 : 미하일 1세의 황후



예브도키야 루키아노바 스트레쉬녜바

미하일 1세의 황후

Eudoxia Streshnyova 

(Евдоки́я Лукья́новна СтрешнёваYevdokiya Lukyanovna Streshnyova

(1608 – 18 August 1645)


예브도키야 루키아노바 스트레시노바는 마하일 1세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마리야 돌고루코바가 죽은뒤 그의 황후가 되는 여성입니다.


에브도키아 스트레쉬녜바는 루키안 스트레쉬노프와 그의 부인인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볼콘스카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외가는 매우 부유한 가문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리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예브도키야가 태어난 직후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했는데 예브도키아의 아버지는 그녀를 부유한 처가에 맡기고는 전쟁터로 나갔다고 합니다. 예브도키아는 부유한 귀족이었던 외가에서 성장했었는데 이런 상황은 그녀가 짜르의 아내로 뽑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1626년 예브도키야는 짜르 미하일의 아내로 간택됩니다. 러시아나 비잔틴 제국에서는 황제나 황위계승자의 아내를 고를때 "간택"의 과정을 거쳤는데 이 과정에서 아름다웠던 예브도키야는 강력한 후보가 되었습니다. 최종후보에 예브도키야와 게오르기 볼콘스키의 딸이 올랐는데 처음에 미하일은 둘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아내를 선택해야했기에 둘 중에 더 아름다웠던 예브도키야를 자신의 아내로 선택했습니다. 미하일의 부모는 미하일의 선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예브도키야가 강력한 가문 출신이 아니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만, 미하일은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미하일 1세


1626년 2월 5일 예브도키야는 미하일과 정식으로 결혼합니다. 재미난 것은 결혼전 이미 예브도키야는 짜리차로 알려진 것입니다. 미하일의 죽은 아내였던 마리야 돌고루코바는 그녀가 결혼한 한참 뒤에야 황후로 대접받았던 반면 예브도키야는 이미 짜르의 아내라는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것입니다. 결혼식때 미하일의 아버지였던 모스크바 대주교는 며느리의 이름을 "아나스타샤"로 바꾸길 원했다고 합니다만 예브도키야는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미하일과 예브도키아의 결혼식


딸이 황후가 되면서 예브도키야의 아버지인 루키안 스트레쉬노프는 엄청난 재산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그에 대해서 재미난 전설 하나가 전해져오는데 루키안의 집에는 낡은 옷 한벌이 소중히 모셔져있었다고 합니다. 루키안은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이 옷을 보면서 기억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것임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었다고 합니다.


권력자 가문 출신이 아니었던 예브도키야는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정치적 권력이 약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여성은 짜르의 어머니였던 마르타 수녀였습니다. 마르타 수녀는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며느리를 아랫사람으로 대했는데 마르타 수녀는 자신이 가는 곳에 황후를 늘 동행 시켰을 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들의 양육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서 예브도키야의 자녀들은 할머니를 더 따랐다고 합니다. 게다가 마르타 수녀가 사망한 뒤에도 남편에게 그다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미하일의 어머니 마르타 수녀


예브도키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는 문제였습니다. 결혼초 예브도키야는 딸들만 낳았고 그 딸들마저 그리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후계자가 될 아들이 필요했던 미하일에게는 초조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미하일과 예브도키야는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미하일은 은자를 만나게 됩니다. 늙은 수도사를 만난 짜르 부부는 그에게 아들을 얻길 원한다고 이야기했으며, 은자는 하느님의 뜻으로 아들을 얻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얻었죠. 이에 짜르부부는 수도원을 짓고 수많은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예브도키야는 10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막내 아들인 바실리를 낳을때 난산이었는데 이후 그녀는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에 짜르부부는 수많은 기적을 행했던 수도사였던 성 알렉산드르 시비르스키를 공경합니다. 그에 대한 공경이 다시 다른 자녀들을 얻게 해줄것이라 여겼었다고 합니다만 결국 더이상 아이들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브도키야는 실권이 없는 황후였으며 이런 상황은 그녀가 교회에 헌신하고 자선사업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했었습니다. 


예브도키야 


예브도키야는 1645년 남편이 죽은 오주뒤에 사망했습니다.


예브도키야와 미하일 사이에서는 모두 열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만 살아서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네명으로 아들이었던 알렉세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짜르가 됩니다.


예브도키야의 아들

알렉세이

표트르 대제의 아버지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