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네개로 끝낼수 있을까요 ㅠ.ㅠ
프랑스의 왕비들...(86) 카스티야의 블란카 : 루이 8세의 왕비(네번째)
카스티야의 블란카
프랑스의 블랑쉬 왕비
Blanche of Castile
Blanca de Castilla
(4 March 1188 – 27 November 1252)
랑그도크 지방에 대한 점령이 완료되었지만 여전히 위험이 남아있었는데 바로 잉글랜드의 위협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국왕 헨리 3세는 가문의 프랑스 영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었으며 결국 이것은 프랑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블랑쉬는 헨리 3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노력을 하는데 이를테면 헨리 3세의 어머니인 앙굴렘의 이자벨과 그녀의 두번째 남편인 라 마르셰 백작 휴 10세 뤼지냥을 설득하는데 성공해서 헨리 3세를 지원하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사실 블랑쉬나 프랑스 군은 헨리 3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는데 이를테면 이전에 블랑쉬에게 불만을 품었던 영주들이 상파뉴 백작령을 공격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전황은 쉽게 잉글랜드쪽에 승리로 돌아가지 않고 지지부진하게 흐르면서 결국 헨리 3세는 큰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블랑쉬는 방어에 어느정도 성공하게 됩니다.
1234년 아들인 루이 9세가 성인으로 친정에 나서자 블랑쉬는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궁정에서 은퇴하지 않고 궁정에 남았으며 아들인 루이 9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남게 됩니다. 블랑쉬는 아들의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잃지 않았으며 아들을 위해서 불만을 품은 영주들을 설득하고 포용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이런 블랑쉬에 대해서 아마 국왕인 루이 9세조차도 어머니에게 함부로 할수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아마도 블랑쉬가 며느리인 프로방스의 마르거리트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블랑쉬는 의지가 강한 시어머니였을뿐만 아니라 권력을 장악했던 여성이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며느리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할수 없었을 것이며 아마도 훗날 마르거리트의 행동을 봤을때 블랑쉬는 며느리의 기를 처음부터 눌러놓으려 했었던듯합니다. 게다가 프로방스 백작령의 상속문제 역시 블랑쉬가 마르거리트에게 불만을 품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블랑쉬가 마르거리트를 며느리감으로 선택한 이유중 하나는 딸밖에 없는 프로방스 백작의 장녀였기 때문에 마르거리트가 프로방스 지방을 상속받으리라 생각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마르거리트의 부모는 마르거리트가 아니라 막내딸인 베아트리스를 프로방스 지방의 상속녀로 선포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블랑쉬가 며느리와 사돈의 집안에 화를 내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스는 블랑쉬의 막내아들인 앙주 백작 샤를과 결혼하면서 이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되게 됩니다.
블랑쉬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여러가지 일에 사용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일이 바로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박해의 대상이었고 자주 재산을뺏기고 쫓겨나는 등의 일을 당했습니다. 루이 9세 역시 유대인들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블랑쉬는 유대인들을 보호했었습니다.
루이 9세는 1248년 7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결정에 블랑쉬는 반대했지만 아들의 뜻을 꺽을수 없었으며 다시 한번 왕국의 섭정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블랑쉬는 아들을 위해서 왕국을 통치했을뿐만 아니라 아들이 필요한 돈을 모아서 성지로 보내주게 됩니다. 이를테면 루이 9세는 1250년 포로로 사로잡혔으며 몸값을 내고 풀려났는데 블랑쉬는 당연히 아들을 위해서 돈을 마련했었습니다. 또 루이 9세는 성지에 머물면서 방어시설을 강화하는데 돈을 썼는데 그 돈 역시 어머니인 블랑쉬가 보내준것이었습니다.
블랑쉬는 1252년 11월 갑자기 아팠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아들인 루이 9세는 여전히 성지에 있었는데 루이 9세는 다음해 봄에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되었으며,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들은후 상심해서 이틀동안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블랑쉬는 루이 8세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중세시대였기에 어려서 죽은 자녀가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더 많이 낳았을수도 있습니다. 13명의 자녀중 그중에 11명이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넷과 딸 한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첫째아들인 루이 9세는 "성왕"으로 알려진 인물로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시성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루이 9세는 프랑스 왕가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둘째아들인 로베르는 할머니인 에노의 이자벨라의 영지였던 아루투아 백작령을 물려받아서 아르투아 백작이 됩니다.
셋째아들인 알퐁스는 푸아투 백작이자 아내인 툴루즈의 잔을 통해서 툴루즈 백작이 됩니다. 그가 툴루즈 백작이 된것은 알비 십자군의 마무리 단계로 블랑쉬가 랑그도크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툴루즈 백작 레이몽 7세의 상속녀인 잔과 아들인 알퐁스를 결혼시켰기 때문입니다.
막내아들인 샤를은 앙주 백작이었으며 형수의 막내동생으로 프로방스 백작령의 상속녀이기도 했었던 베아트리스와 결혼했으며 샤를은 프로방스 백작으로 백작령을 강하게 손에 움겨쥐었을뿐만 아니라 후에 교황과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갈등 상황을 통해서 시칠리아 왕위까지 얻게 됩니다. 이것은 시칠리아 왕국의 내분을 초래했으며 결국 그의 후손들은 나폴리 왕국의 통치자가 됩니다.
딸인 이자벨은 어려서부터 수녀가 되길 원했었습니다. 사실 이자벨은 동맹협정을 통해서 라마르셰 백작 위그 10세 뤼지냥과 그의 아내인 앙굴렘의 이자벨의 장남과 결혼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만, 수녀가 되길 원해서 이 결혼을 확고히 거부했었습니다. 또한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었던 콘라트 4세 역시 그녀와 결혼을 바랬지만 역시 이자벨은 결혼을 거부했고 결국 수녀가 됩니다. 이자벨은 오빠인 루이 9세로부터 땅을 얻어서 수녀원을 짓고 그곳에서 수녀로 살아갔습니다. 이자벨 역시 오빠 루이 9세처럼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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