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 사실 블란카에 대한 전기를 구했거든요. 왠지 전기를 읽고 쓰고 싶었는데...
문득 "새해 특집으로 할걸 남겨둬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쿨럭
...내년 새해특집(..올해새해특집쓴지 며칠 안됐는데 말입니다=-=)은 아마도 블란카나 블란카의 언니인 베렌겔라(이것도 전기 구함)를 할까 고민중입니다만, 블란카의 며느리들인 프로방스 자매들도 살짝 하고 싶기도 합니다. (이것도 전기 구함.)
프랑스의 왕비들...(85) 카스티야의 블란카 : 루이 8세의 왕비(세번째)
카스티야의 블란카
프랑스의 블랑쉬 왕비
Blanche of Castile
Blanca de Castilla
(4 March 1188 – 27 November 1252)
블란카와 블란카의 아들 루이 9세
블랑쉬의 남편이 죽었을때 블랑쉬는 38살이었고 아들이자 후계자인 루이는 겨우 12살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당연히 섭정이 필요했는데 블랑쉬의 남편인 루이 8세는 아내에 대해서 신뢰가 컸고 아마도 이것이 블랑쉬가 아들인 루이 9세의 섭정이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막내아이를 임신중에 남편이 죽은 것은 블랑쉬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블랑쉬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만 할수는 없었습니다. 블랑쉬나 블랑쉬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루이 9세에게는 지지세력이 매우 적었습니다. 프랑스 내 영주들은 프랑스 국왕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으며 이렇게 왕권이 약화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려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루이 8세가 프랑스 남부 지역인 랑그도크 지방을 장악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던 것 역시 블랑쉬에게는 부담이 됩니다. 루이 8세는 랑그도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채 이질로 사망했으며 이것은 도리어 국왕에 대해서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킬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었습니다.실제로 루이 8세의 동생이자 필리프 2세의 아들이었던 볼로뉴 백작 필리프는 랑그도크 지방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형과 함께 했었지만, 형이 죽은뒤에 반란을 일으킨 영주들을 지지하고 함께 동참하기도 했었습니다. 게다가 여성인 블랑쉬가 섭정으로 임명된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이들 역시 있었습니다. 몇몇 이들은 국왕을 블랑쉬로부터 뺏아서 자신의 보호아래두고 스스로 섭정이 되고 싶어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시도는 루이 8세 사망 초기, 블랑쉬가 남편을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도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블랑쉬는 이런 문제에 직면해있었지만 섭정으로, 아들의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겨우 몇몇 최측근들의 도움으로 버틸수 있었는데 이들은 필리프 2세 시절부터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많았고 이때문에 블랑쉬가 버틸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블랑쉬는 자신의 외할머니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처럼 정치적 능력이 있는 여성이었을뿐만 아니라 섭정으로써의 그녀의 확고한 통치 방식은 결국 아들인 루이 9세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또한 프랑스를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갈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어쩌면 블랑쉬가 외할머니보다 훨씬더 좋은 평가를 받는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블랑쉬는 통치 초기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자신과 아들에게 적대적이었거나 적대적일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화해를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부빈전투(프랑스 왕가가 노르망디 공작령을 차지하게 된 계기가 된 전투)이후 12년간 포로로 잡혀있던 플랑드르 백작 페랑(포르투갈의 페르난두)를 석방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블랑쉬는 점차 왕국을 안정시켰으며 세력을 얻게 됩니다. 그녀는 많은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는데 이를테면 상파뉴 백작 티보4세가 있었습니다. 티보의 어머니는 나바라의 인판타로 블랑쉬의 아버지와는 사촌관계이기도 했을뿐만 아니라 티보 4세의 할머니인 프랑스의 마리는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딸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관계는 아마도 티보가 루이 8세와 불화가 있었지만 블랑쉬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을뿐만 아니라 왕권을 위해서 군대를 조직하는데 큰 힘이 보태주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대해서 블랑쉬의 적들은 블랑쉬가 티보와 불륜관계라는 소문을 퍼트렸으며 심지어 루이 9세에게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티보와 결투하라고 부추기기까지 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이런 관계 덕분에 블랑쉬는 남편이 해내지 못했던 현재 프랑스 남부 지역인 랑그도크 지역의 점령을 완수했으며 랑그도크 지역의 핵심 영주였던 툴루즈 백작 레이몽 7세와 1229년 파리조약을 체결하면서 그의 통치 영지를 왕가로 귀속시킬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시몽 드 몽포르이 이끄는 알비 십자군이 점령했던 랑그도크 지역의 모든 권리를 프랑스 국왕과 왕가가 얻을수 있게 한것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쓰고있는글들 > 목요일 : 프랑스의왕비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의 왕비들...(87) 프로방스의 마르거리트 : 루이 9세의 왕비 (첫번째) (0) | 2022.05.19 |
---|---|
프랑스의 왕비들...(86) 카스티야의 블란카 : 루이 8세의 왕비(네번째) (0) | 2022.04.28 |
프랑스의 왕비들...(84) 카스티야의 블란카 : 루이 8세의 왕비(두번째) (0) | 2022.04.14 |
프랑스의 왕비들...(83) 카스티야의 블란카 : 루이 8세의 왕비(첫번째) (0) | 2022.04.07 |
프랑스의 왕비들...(82) 메라니아의 아그네스 : 필리프 2세의 왕비(두번째) (0) | 202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