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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84) 카스티야의 블란카 : 루이 8세의 왕비(두번째)
카스티야의 블란카
프랑스의 블랑쉬 왕비
Blanche of Castile
Blanca de Castilla
(4 March 1188 – 27 November 1252)
루이 8세와 블란카의 대관식
블란카는 1200년 5월 23일 노르망디에서 필리프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루이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블란카는 12살이었으며 루이는 블란카보다 1살 더 많았었습니다. 둘이 노르망디에서 결혼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필리프 2세가 여전히 아내인 잉에보르와의 문제때문에 파문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국왕의 영지 내에서 성무가 세례와 종부성사를 제외한 성무가 금지 되었기에 당연히 결혼식을 치룰수없었던것이 노르망디에서 둘이 결혼한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것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정치적 문제도 있었는데 아마도 노르망디 공작령이 물론 둘은 교회에서 정한 최소 결혼 연령을 넘겨서 결혼하긴 했지만 둘은 너무 어렸고 이때문에 결혼이 완성된것은 몇년 이후일 것입니다. 블란카가 1205년 첫아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결혼뒤 프랑스식으로 블랑쉬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지게 되는 블란카는 남편 루이와 매우 잘 맞는 사람들이 됩니다. 특히 블랑쉬는 남편 루이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습니다. 잉글랜드 내에서는 존 왕에 대한 반발이 심해졌으며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존 왕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으며 결국 이것은 귀족들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을 승인도록 압력을 넣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마그나카르타가 인정받지 못하자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는데 중요한 것은 귀족들은 존 왕을 대신할 인물로 블랑쉬의 남편인 루이를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블랑쉬는 헨리 2세의 외손녀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리를 가질 권리가 있었습니다. 헨리 2세가 어머니인 마틸다 황후를 통해서 잉글랜드 왕위를 얻었던 것을 생각하면 블란카의 권리 역시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블랑쉬는 남편이 잉글랜드 왕위를 얻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지지했었으며 필리프 2세 역시 처음에는 어느정도 여기에 솔깃하게 됩니다. 이때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 공작령을 장악하긴 했지만, 노르망디 공작령내 가신들이 과연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할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노르망디 공작령외에도 프랑스 내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는 많이 있었고 이것은 필리프 2세에게 여전히 부담이 되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1216년 존 왕이 사망하고 그의 9살 난 아들인 헨리 3세가 즉위하자 잉글랜드 내 귀족들은 어린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루이가 잉글랜드 국왕이 될 기회는 사라지게 됩니다. 루이의 아버지인 필리프 2세 조차도 더이상 아들을 지원하지 않으려했는데, 그때도 블랑쉬는 여전히 남편을 지지했었으며 루이 역시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었습니다.하지만 잉글랜드의 유명한 기사이자 헨리 3세의 섭정이었던 1대 펌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서 루이의 군대는 힘을 쓸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1217년 조약을 통해서 보상금을 받으면서 루이는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했었습니다.
남편이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하는 동안 블랑쉬는 아마 계속해서 아이를 낳고 교육시키는 일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블랑쉬는 1226년까지 열세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첫째인 1205년에 테어난 딸 블랑쉬부터 1226년 말이나 1227년유복자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샤를까지 열세명이 알려져있습니다만 중세시대 특성상 일찍 죽은 아이들의 기록은 누락되어있을수도 있습니다. 블랑쉬와 루이가 이렇게 많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그만큼 부부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블랑쉬는 특히 남성 후계자가 중요했던 시기 10명이상의 아들을 낳았으며 그중 네명의 아들들이 성인으로 성장했다는 것 자체가 블랑쉬가 프랑스 왕가에서 입지가 강해질수 있는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됩니다. 필리프 2세에게는 아들이 단지 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둘째아들인 필리프는 오래도록 적자로 인정받지 못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왕실의 후계자에 대해서 불안감을 가질수 있는 것이었는데 블랑쉬는 끊임없이 아이들 그것도 아들들을 낳았기에 프랑스 왕가의 후계자 문제를 해소해줬었고 그만큼 입지가 강해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블랑쉬는 똑똑하고 교육을 잘 받았다고 알려져있었으며 이런 그녀는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매우 신경썼었습니다. 그 때문에 블랑쉬는 인기있는 왕족이 될수 있었습니다.
1223년 블랑쉬의 시아버지인 필리프 2세가 사망하고 블랑쉬의 남편인 루이가 국왕 루이 8세로 즉위했으며 블랑쉬 역시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아마도 블랑쉬는 왕비가 된 후에도 여전히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있었으며 아마도 정치적 영향력보다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더 집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블랑쉬의 삶은 1226년 11월 바뀌게 됩니다. 남편인 루이 8세가 이질로 사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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