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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인판타들...(39) 시칠리아의 콘스탄차 : 페데리코 2세의 딸 (첫번째)

엘아라 2022. 4. 1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이게 애매하더라구요.

시칠리아 왕국은 이탈리아로 들어가야하는데 바르셀로나 가문은 아라곤 왕가이니 애매하더라구요.

원래는 시칠리아의 공주들이라고 쓸려니 왠지 이베리아 반도 항목에 안 맞는것 같아서 그냥 아라곤의 인판타들에 넣을까 싶은데 이건 또 이것대로 애매하더라구요. ㅠ.ㅠ

일단 이렇게 쓰고 안되면 나중에 이탈리아 항목을 따로 파고 제목을 다 시칠리아의 공주들로 고치고 넘버링을 바꿀까 라는 생각이 살짝 드네요. =-= 고민입니다. 음냐

 

아라곤의 인판타들...(39) 시칠리아의 콘스탄차 : 페데리코 2세의 딸 (첫번째)

 

 

시칠리아의 콘스탄차

예루살렘과 키프로스의 왕비

아르메니아의 왕비

Costanza d'Aragona o di Sicilia 

(1305 – Cipro, 19 aprile 1344)

아라곤 왕가 출신의 시칠리아 왕가 문장

 

시칠리아의 콘스탄차는 시칠리아의 국왕 페데리코 2세(피디리쿠2세)와 그의 아내인 앙주의 엘레오노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콘스탄자의 아버지인 페데리코 2세는 원래 아라곤의 인판테로 페데리코 2세의 아버지는 아라곤의 페드로 3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통해서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차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손녀이자 시칠리아의 국왕이었던 만프레디의 딸이었습니다. 복잡한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 과정중에서 콘스탄차는 시칠리아 왕위계승권을 주장했으며, 콘스탄차의 남편인 페드로 3세는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시칠리아 왕위를 주장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앞쪽의 글 아라곤의 인판타들...번외편 시칠리아 왕국 https://blog.daum.net/elara1020/8468131 을 참조해주세요.) 그렇기에 아마도 이 콘스탄차는 할머니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녀로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했던 시칠리아의 콘스탄차의 이름을 딴것일것입니다.

 

원래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는 페데리코 2세의 형이었던 하이메2세가 물려받았었습니다만, 큰형이었던 알폰소 3세가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하이메 2세는 아라곤의 국왕을 겸하게 되었으며 동생인 페데리코를 시칠리아의 총독으로 보냈었습니다. 후에 하이메 2세는 외교적 안정성을 위해서 시칠리아 왕위를 나폴리 왕가로 넘기려했지만 시칠리아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고 하이메 2세의 동생이자 섭정이었던 페데리코를 국왕으로 선출했으며 이렇게 페데리코 2세는 국왕이 되었습니다. 재미난 것은 페데리코 2세는 스스로를 "페데리코 3세"라고 불렀지만 실제로 넘버링은 페데리코 2세라고 합니다.

 

시칠리아의 페데리코 2세(또는 페데리코 3세), 콘스탄차의 아버지

 

콘스탄차의 어머니인 앙주의 엘레오노르(시칠리의 엘레오노라)는 나폴리의 국왕이었던 카를로 2세와 그의 아내인 헝가리의 마리아의 딸이었습니다. 원래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 인근의 이탈리아 본토 영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레오노르의 할아버지인 앙주 백작 샤를(카를로 1세)이 교황으로부터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 권리를 얻었으며 무력으로 왕국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시칠리아 섬쪽에서 카를로 1세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페데리코 3세의 어머니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차를 왕위게승자로 인정합니다. 결국 원래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 섬을 중심으로 하는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와 그 인근의 이탈리아 본토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나폴리 왕국으로 나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두 나라사이의 평화를 위해서 앙주의 엘레오노르와 아라곤의 인판테였던 페데리코가 결혼했던 것입니다.

 

엘레오노르와 자매들

 

콘스탄차는 1306년경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막내아들이었던 로베르와 약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1308년 로베르가 사망해서 이 약혼은 깨지게 됩니다. 약혼이 깨진 10년쯤 후인 1317년 콘스탄차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상대는 그녀보다 30살 이상이나 많았던 예루살렘과 키프로스의 앙리 2세였습니다. 

 

키프로스의 앙리 2세는 안티오크-뤼지냥 가문 출신으로 뤼지냥 가문은 프랑스의 푸아티에의 강력한 귀족 가문이었던 뤼지냥 가문의 일족이었습니다. 존왕의 아내였던 이자벨 당굴렘이 원래 약혼했었던 가문이 바로 이 뤼지냥 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뒤 전 약혼자 아들과 재혼 =-=) 이 뤼지냥 가문의 일부가 십자군 전쟁동안 예루살렘으로 갔으며 안티오크의 영주 지위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앙리 2세의 아버지였던 위그 3세 시절에 키프로스의 왕위를 얻었으며 앙리 2세는 예루살렘의 왕위까지 얻었던 것입니다.

 

키프로스의 앙리 2세의 동전

 

콘스탄차는 앙리 2세와 결혼해서 예루살렘과 키프로스의 왕비가 됩니다만 결혼 7년후인 1324년 앙리 2세가 죽으면서 과부가 됩니다. 콘스탄차와 앙리 2세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으며 왕위는 남편의 조카인 위그 4세가 물려받게 됩니다.

 

콘스탄차는 남편이 죽은후인 1326년 친정인 시칠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