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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에 대한 짧은 생각 하나

엘아라 2022. 2. 1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하하..30편을 못채워서 금요일이 비네요.

그래서 글을 써놓은 것 하나를 올립니다.

 

사실 최근에 한국사에 대해서 도서관에서 수업을 듣거든요. 뭐랄까 일단 제 한국사 수준이 20세기에 머물러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21세기에는 어떻게 배우나 싶어서 수업을 듣는데 뭐 기본적인 것은 제가 배운것이랑 비슷하더라구요 아하하..

하여튼 듣다가 보니까 문득 조선시대에 대해서 좀더 찾아보자 싶었는데 처음에는 조선 노비에 대한 글을 읽다가 그다음으로는 조선 후궁에 대해서 읽다가 정신차려보니 조선시대 궁방에 대한 논문을 미친듯이 모았더라구요 -0-;;;;;조선시대 궁방에 대해서 좀더 체계적으로 이해해서 글을 써보고 싶은데 일단 시간이 없네요. =-=

 

어쨌든 정신 차려보니 또 숙빈 최씨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ㅎㅎㅎ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에 대한 짧은 생각 하나

영조의 사친(私親: 국왕의 생모를 부르는말)이었던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와의 관계와 희빈 장씨의 무고(巫蠱 : 주술을 통해서 다른이를 저주함)을 숙종에게 고했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있고 드라마의 단골 소재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20세기까지는 숙빈이 그저 후궁으로 인현왕후에 충성적인 모습으로 왕후를 저주한 희빈 장씨를 국왕에게 고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충성을 다하는 모습은 결국 아들인 영조가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는 모습의 정당성까지 부여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21세기가 들어서면서 드라마에 나타나는 모습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숙빈 최씨의 모습은 정치적인 인물로 매우 능동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숙종대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양측을 대변하던 인물들에 대한 모습은 이미 남인 세력을 대변하던 희빈 장씨나 서인 세력을 대변하던 인현왕후의 대립 구도를 어느정도 이해하던 사람들에게 인현왕후가 궁안에서 실질적인 힘을 쓸수 없던 시기에 인현왕후를 대신해서 서인의 대변인 역할로 숙빈최씨를 주목하게 되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생각을 연연하다가보면 인물에 대한 평가나 그 인물의 삶에 대한 모든것을 정치적으로 이해하려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숙종이 인현왕후 사후 인원왕후가 들어오면서 숙빈 최씨가 궁에서 내보내졌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증거로 숙빈방 즉 이현궁이 등장합니다.

 

조선시대 궁방이라는 개념은 좀 복잡하게 발전해나가게 됩니다. 궁방宮房이라는 말 때문에 그저 집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궁방이라는 개념은 초기에는 왕족들이나 왕족들이 사는 집이라는 개념이 있었을지 몰라도 임진왜란 이후에 점차 개념이 변하기 시작해서 왕족들의 집을 포함해서 사유재산등을 관리하는 관청의 개념등으로 발전합니다. 그렇기에 숙빈방이라고 해서 숙빈이 사는 집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조선왕조 실록에서 희빈 장씨가 궁에 살고 있던 숙원 시절에  "장숙원방"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또 숙빈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연잉군방"에 대한 재무기록도 남아있기도 합니다. 게다가  숙빈 최씨의 출산에 대한 공식 기록인 "호산청일기"에서 "최숙원방호산청일기""최숙의방호산청일기""최귀인방호산청일기"라는 표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렇기에 숙빈방이라는 단순히 숙빈의 집만을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며, 또한 숙빈이 궁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했을때 조차도 비록 품계에 따라서 이름이 다르게 표기되었지만 이미 이런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숙의방 호산청 일기, 갑술년(숙종20년) 8월, 영조 탄생때

 

 

게다가 흔히들 숙빈 최씨가 궁밖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의 근거로 생각하는 숙종 37년 6월 22일 기사 역시 잘 살펴봐야 합니다. 이 기사는 숙종이 이현궁을 회수를 이야기하면서 이현궁은 현재 숙빈방인데 지나다니면서 "미안했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숙빈이 궁밖으로 나갔다는 해석하는 이야기에서는 이 숙종이 "미안했다"라고 한것이 숙빈에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기사의 전후를 살펴보면 지속적으로 연잉군이 관례를 치루고 궁밖으로 나가는 문제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숙종은 연잉군이 궁밖으로 나가야하는데 집이 없기에 집을 사주라는 명하게 됩니다. 이에 대신들은 이미 숙빈에게 큰 집이 있는데 왜 연잉군에게 집을 사주냐고 반대를 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기어이 집을 사줬고, 대신들은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는데 결국 숙종은 "지나다니는데 미안했다"라는 언급을 하면서 이현궁 회수의 명을 내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부분인데 신하들은 숙종에게 이전의 내수사 혁파 문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했었으며 여기에 숙종이 결단을 내린것에 경탄을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숙종이 미안한 주체가 숙빈이 아니라 바로 백성들이었다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숙종은 아들에게 집을 사주고는 결국 당시 숙빈방이었던 이현궁을 회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숙종이 숙빈 최씨의 이현궁을 회수한것은 무슨뜻이었을까요? 조선초 후궁들은 선왕이 죽은뒤 궁밖으로 나가서 비구니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에 맞지 않았고 후대에 가면서 성리학적 질서가 확고해지면서 결국 후궁들이 선왕이 죽은뒤 궁밖에서 따로 살수 있는 기본 경제적 바탕이 필요했고 이것이 바로 궁방이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비구니가 되지 말고 궁방에서 생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실 후궁들의 궁방은 선왕의 후궁들에게 주로 내려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종대가 되면서 선왕의 후궁들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현종한테 후궁이 없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렇지만 숙종은 자신의 후궁들에게 "궁방"을 줬으며 이것은 생전에 이미 후궁들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한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궁에서 살고 있는 후궁들에게도 궁방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연잉군이 자신의 궁방을 가지게 되면서 당연히 숙빈 최씨의 노후는 연잉군이 맡을 것이기에 내수사 혁파와 관련되어서 결국 이현궁을 회수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국왕이 살아있고 아들이 궁안에서 성장하고 있는데, 죄를 짓지도 않은 후궁이 궁밖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숙빈 최씨는 품계가 낮은 궁녀도 아니었으며 정1품 빈의 신분에 아들까지 있었습니다. 게다가 숙종에게 총애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후궁이 특별한 일이 없이 국왕과 아들이 모두 궁에 있는 상황에서 혼자 궁밖에서 산다는 것이 그다지 신빙성이 없어보입니다. 

 

자료출처

조영준(Cho Young-jun). "조선후기 궁방(宮房)의 실체." 한국학 31.3 (2008): 273-304.

조영준(Cho Young-jun). "조선후기 ‘생애주기’형 궁방의 경제적 기반과 운영 양상." 한국학 39.3 (2016): 111-138.

조은숙 ( Cho Eun-suk ). "『호산청일기』 연구." 고전문학과 교육 36.- (2017): 205-236.

조선왕조실록(숙빈최씨 검색,이현궁 검색)

승정원일기(조선왕조실록 검색에 나온 날짜들을 인용

그림출처

네이버 백과사전중 "호산청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