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도대체 분가들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엉엉엉..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43) 벨프 가문 : 마그누스 2세 이후의 볼펜뷔텔
마그누스 2세는 볼펜뷔텔 영지를 물려받았었으며 뤼네부르크에 대한 권리도 주장했었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들인 프리드리히 1세와 베르나르트 1세 그리고 하인리히가 아버지의 권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이들은 당연히 뤼네부르크 계승전쟁과 연결되며 결국 프리드리히와 베르나르트 1세는 뤼네부르크를 두고 경쟁관계였던 작센의 벤젤(벤첼슬라우)의 딸들과 각각 결혼했으며 이것은 결국 작센-비텐베르크 가문에서 뤼네베르크를 다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으로 권리를 넘겨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그누스 2세의 세아들 중 프리드리히1세는 남성후계자 없이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동생들인 베르나르트 1세와 하인리히가 영지를 상속받게 되죠. 둘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령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령을 모두 물려받았으며 한동안 함께 통치합니다만, 형인 베르나르트 1세가 볼펜뷔텔 공령을 동생인 하인리히가 뤼네부르크 공령을 상속받기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하인리히가 미리 죽자 형인 베르나르트 1세는 조카들인 빌헬름과 하인리히와 다시 한번 영지를 분배합니다. 이때 베르나르트 1세는 뤼네부르크 공령을 가지기로 했으며 조카들인 빌헬름과 하인리히가 볼펜뷔텔 공령을 가지기로 합니다.
빌헬름 1세Wilhelm der Siegreiche(넘버링에 따라서는 3세 또는 4세) 과 그의 동생인 하인리히Heinrich der Friedfertige는 볼펜뷔텔을 공동으로 통치했었지만, 결국 둘은 영지를 분리하려합니다. 빌헬름은 적극적으로 통치에 집중했을뿐만아니라 주변 영주들과도 마찰을 빚게 되죠. 아마 이것은 동생인 하인리히가 자신의 몫은 자신이 통치하고 싶어하는 원인이 될듯합니다. 그래서 결국 빌헬름 1세와 하인리히는 영지를 나누게 되는데 하인리히는 볼펜뷔텔을 차지했으며, 반면 빌헬름은 칼렌부르크를 중심으로하는 지역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남성후계자를 얻지 못했으며 결국 빌헬름은 다시 동생의 영지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빌헬름은 괴팅겐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오토 2세가 죽은뒤 그의 영지 역시 얻게 됩니다. 이렇게 빌헬름 1세는 볼펜뷔텔, 칼렌부르크,괴팅겐을 얻게 되었습니다.
빌헬름1세 에게는 두 아들인 프리드리히와 빌헬름이 있었습니다. 형제는 당연히 아버지의 영지를 공동으로 상속했습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좀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는 정신적인 불안정함이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나 교회와도 마찰을 빚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가 죽은뒤 당연히 분할 상속을 주장했고 자신의 몫을 얻게 됩니다만, 주민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결국 동생인 빌헬름이 형을 체포했으며 물러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독으로 아버지의 영지를 통치하게 되죠.
빌헬름에게는 다시 두 아들인 하인리히 4세와 에릭1세가 있었습니다. 빌헬름은 생전에 두 아들에게 영지를 아예분할해줬습니다. 하인리히 4세에게는 볼펜뷔텔 영지를 물려줬으며 에릭 1세에게는 칼렌베르크-괴팅겐 영지를 물려줬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와 에릭 1세는 아버지 생전에 영지의 통치에 참여했었으며 아버지가 죽은뒤 영지를 나누었습니다.
칼렌베르크의 에릭 1세는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의 엘리자베트와의 사이에서 후계자인 에릭 2세를 낳았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아들이 미성년일때 남편이 사망하고 난뒤 아들의 섭정으로 일했는데 그녀는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을 지지했으며 자신이 루터파임을 확실히 했고 영지내에서도 개신교를 인정해주게 되죠. 하지만 아들인 에릭 2세는 종교개혁을 거부했으며 어머니에 반해서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려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에릭 2세는 남성후계자를 얻지 못했으며 결국 영지는 오촌 조카였던 볼펜뷔텔의 율리우스에게 돌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에릭 1세의 형이었던 볼펜뷔텔의 하인리히 4세는 작센 지방을 두고 주변 영주들과 다툼을 벌였으며 결국 전투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그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지만 둘째아들인 하인리히를 제외한 모든 아들들이 성직자가 되거나 튜턴기사단(튜던기사단은 종교기사단으로 튜던기사단의 기사들은 독신으로 지내야했습니다.)에 들어갔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하인리히 4세 역시 아들한명에게 영지를 상속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듯합니다.
하인리히 4세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5세는 역시 평생 주변의 영주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하지만 황제 카를 5세를 지지했었으며 이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게 됩니다. 비록 개신교에 적대적이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평생 가톨릭으로 남았으며 가문의 영지내에서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으며 또한 개신교로 개종한 작센의 여러지역과 여전히 마찰을 빚었다고 합니다. 하인리히 5세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전투중 전사했으며 영지는 살아남은 아들인 율리우스가 상속받게 됩니다.
율리우스는 어린시절 약간의 장애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아버지 하인리히 5세의 마음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하인리히 5세는 율리우스를 성직자로 만들려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형들이 전사하게 되면서 결국 남은 아들인 율리우스가 영지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율리우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어려서부터 전사가 아닌 교회와 대학에서 공부를 했던 율리우스는 영지를 잘 통치한 인물이 됩니다. 율리우스는 오촌인 오토 2세가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그의 영지인 칼렌부르크-괴팅겐 영지도 물려받게 되죠.
율리우스의 아들이었던 하인리히 율리우스는 교육을 잘받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시 교육을 잘받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외교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더 능숙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인리히 율리우스는 개신교로 개종했었지만 합스부르크 황제의 신임을 얻었으며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지에 대한 통치권을 확고히 하려했었고 특권을 제한하려했기에 브라운슈바이크의 주민들이 그에 대해서 반발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하인리히 율리우스는 그루벤하겐 분가의 필립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루벤하겐 영지도 물려받게 됩니다.
하인리히 율리우스의 아들중 둘째아들은 장남보다 더 유명합니다. 바로 30년 전쟁에서 "할버슈타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크리스티안이었죠.
하지만 하인리히 율리우스의 영지를 이어받은 인물은 장남인 프리드리히 울리히였습니다. 프리드리히 울리히는 유럽의 여러지역을 다니명서 공부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무능한 인물이었으며 30년 전쟁중인 독일에서 그의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은 결국 그의 영지내에서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 세력이 전투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영지의 대부분이 약탈당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프리드리히 울리히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으며, 그의 영지는 뤼네부르크 쪽 분가들에 의해서 분할상속되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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