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엉엉엉..쓰다보니 세개나 되네요 =0-;;;;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번외편 12. 나탈리야 브라소바 : 마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부인 (세번째)
나탈리야 브라소바
나탈리야 세르게예브나 세레메티브스카야
Natalia Brasova, Countess Brasova
Natalia Sergeyevna Sheremetyevskaya
Наталья Брасова
Ната́лья Серге́евна Шереме́тьевская;
(27 June 1880 – 26 January 1952)
미하일 대공과 나탈리야는 이제 함께 살게 되었지만 둘은 서로의 관계를 좀더 공식적으로 하길 바랍니다. 바로 결혼식이었죠. 하지만 둘의 결혼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미하일 대공은 니콜라이 2세의 유일한 남동생이었는데, 니콜라이 2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는 혈우병 환자였기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알렉세이가 잘못된다면 황위는 미하일이 이어가야했는데 황실 상속법상 귀천상혼을 한 사람을 계승권이 박탈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문제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귀천상혼에 부정적이었던 황태후는 말할 필요도 업었죠.
미하일과 나탈리야는 1912년 함께 휴가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둘은 기습적으로 1912년 10월 빈에 있던 정교회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것은 당연히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었죠. 둘은 함께 베네치아로 갔으며 나탈리야의 두 아이들인 나탈리야와 게오르기 역시 이곳으로 오게 됩니다. 이후 미하일은 형인 니콜라이 2세에게 자신의 결혼을 알리게됩니다. 당연히 황제는 화를 냈으며 미하일의 계승권리를 박탈하고 러시아에서 추방하게 됩니다. 황제가 미하일 대공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상대적으로 나탈리야에 대해서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탈리야와 미하일 대공과 자녀들은 1913년 9월이 되어서야 런던 인근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미하일 대공과 나탈리야는 사교활동을 하면서 살았습니다만, 나탈리야는 영국 왕실의 초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혼녀였던 나탈리야가 궁정에 소개되는 것은 허락받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1차대전이 일어나자 미하일 대공은 형인 니콜라이 2세에게 러시아로 돌아가서 군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니콜라이 2세는 승락했습니다. 그래서 미하일 대공은 나탈리야와 아이들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가게 되죠. 미하일 대공은 전선에 나갔으며 나탈리야는 다른 많은 귀족여성들처럼 자선병원을 운영하게 됩니다. 이동안 나탈리야는 미하일 대공의 사촌이었던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과 잠시 로맨틱한 관계가 된다고 합니다. 드미트리 대공은 나탈리야에게 호감을 가지고 대했었는데 나탈리야는 그의 애정에 대해서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으며 질투하는 남편에게 드미트리의 애정은 자신이 미하일을 사랑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확고히 말했다고 합니다. (...-0-;; 마성의 여인인것인가요.)
1915년 니콜라이 2세는 나탈리야와 나탈리야의 아들인 게오르기를 정식으로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니콜라이 2세가 미하일 대공의 결혼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기는 "브라소프"백작으로 불렸으며 당연히 계승권리는 없었습니다. 나탈리야 역시 "브라소바"백작부인이라고 정식으로 불리게 되죠. 이렇게 되면서 사교계에서 나탈리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 늘어가게 됩니다. 물론 황실에서는 여전히 나탈리야에게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며 특히 알렉산드라 황후와 마리야 황태후는 나탈리야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었습니다.
미하일은 1916년 말이 되면서 아팠기에 전선에서 잠시 돌아와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17년이 되면서 러시아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면서 황실 가족들의 안위도 위험하게 되죠.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면서 아들인 알렉세이의 계승권도 포기하게 됩니다. 이에 황위는 동생인 미하일에게 돌아가게 됩니다만 미하일은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황위를 받아들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 황태후가 매우 화를 냈었다고 합니다.) 미하일의 거부 이후 두마에서는 아예 제정을 폐지하게 되죠.
제정이 폐지된후 황실 가족들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은 물론 다른 황실 가족들 모두 가택연금당하거나 체포당하게 됩니다. 미하일 대공 역시 가족들과 함께 가치나의 집에서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죠. 많은 황족들이 목숨의 위협을 느꼈으며 이에 러시아를 떠날 궁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미하일 대공과 나탈리야 역시 그랬죠. 나탈리야는 러시아를 떠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결국 미하일 대공은 체포되게 됩니다.
나탈리야는 남편이 체포된뒤 아들인 게오르기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덴마크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아서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했었죠.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미하일 대공은 페름으로 이송됩니다. 나탈리야는 남편과 함께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이 역시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미하일 대공은 1918년 6월 살해당했습니다만, 볼셰비키는 이를 감추기 위해서 미하일 대공이 탈출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탈리야는 남편을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수소문했었는데 결국 그녀도 체포당하게 됩니다. 나탈리야는 딸과 다른 가족들과 함께 간신히 도망칠수 있었으며 키예프를 거쳐서 오뎃사로 갔고 그곳에 있던 영국 전함을 타고서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칠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탈리야는 딸과 함께 간신히 영국으로 왔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보석이나 재산등을 어느정도 챙겨왔었기에 아주 힘들게 살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에는 미리 러시아에서 탈출시켰던 아들 게오르기가 영국으로 왔었죠. 나탈리야는 딸과 아들을 기숙학교에 보내서 교육시켰으며 생활비는 자신의 보석들을 팔아서 충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산은 늘 부족했었죠.아마 이것은 나탈리야가 미하일의 재산을 찾아서 상속받기 위해서 노력했던원인일 것입니다.
미하일의 죽음이 확정적이지 않았지만 1924년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은 니콜라이 2세와 미하일 대공의 죽음을 선언하고나서 자신이 황위계승자임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키릴 대공은 나탈리야와 아들인 게오르기에게 로마노프스키-브라소프 공이라는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키릴의 지지자들만 인지하는 지위였다고 합니다. ( 그러고 보니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의 생사 뿐만 아니라 미하일 대공의 생사도 애매했었네요. 황실 가족들이 황태후 생전에 황위에 대해서 논하지 말자는 한 이유가 이해가 되기도 하네요. ㅠ.ㅠ)
1927년 나탈리야는 금전적 문제 때문에 파리로 이사가게 됩니다.(런던보다 생활비가 덜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탈리야의 아들인 게오르기는 1931년 7월 차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물론 나탈리야에게는 딸인 타타가 남아있었지만 타타는 어머니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었기에 나탈리야와의 관계가 아주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탈리야는 점차 더 금전적인 문제를 겪게 되는데 특히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면서 딸과 아예 연락을 할수 없었고 늙고 병들고 돈까지 없었던 나탈리야는 매우 궁핍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952년 암으로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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