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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310) 샤를로트 에케르만: 칼 13세의 정부 (두번째)

엘아라 2021. 4. 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어디 호텔같은데서 일주일간 짱 박혀서 글을 쓰고 싶습니다. --;;;;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돈을 들이느니 그냥 집에서 우울하게 글을 쓰는 편이 낫네요 -0-;;

로또 안되나..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310) 샤를로트 에케르만: 칼 13세의 정부 (두번째) 

 

샤를로트 에케르만

베아타 카를로타 에케르만

Beata Charlotta "Charlotte" Eckerman

(1759 – 16 January 1790)

 

샤를로트는 1779년 국왕의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의 공식 정부가 됩니다. 칼은 이미 발레리나였던 샤를로트 슬로스베리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를 공식 정부로 만들수는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슬로스베리와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고 있었으며 아마 이 와중에 샤를로트가 그의 공식 정부가 될수 있었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 궁정에서는 공작의 아내였던 헤드빅 엘리자베트 카를로타를 매우 동정하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공작이 대놓고 연애질을 하는것도 모자라서 공식 정부를 얻은것은 아내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여겼던듯합니다.

샤를로트는 쇠데르만란드 공작과 함께 국왕 구스타프 3세에게 공식 정부를 얻어주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마 샤를로트 에케르만은 샤를로트 슬로스베리보다는 영향력이 떨어졌던듯합니다.

 

칼 13세

 

둘의 관계는 1781년 끝나게 됩니다. 여러가지 소문이 돌았었지만 사실 쇠데르만란드 공작이 프랑수아즈-엘레오노르 빌랑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기에 둘의 사이가 끝난것이라고 합니다. 

 

1781년 공작과의 관계가 끝나면서 로열 오페라단에서의 샤를로트의 지위도 끝나게 됩니다. 구스타프 3세는 샤를로트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었는데,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이 그녀를 보호했기에 참았었던듯합니다. 하지만 공작과의 사이가 끝나면서 국왕은 이제 대놓고 샤를로트에 대해서 냉대를 하게 됩니다. 구스타프 3세는 샤를로트를 로열 오페라단에서 쫓아냈으며 드로트닝홀름 궁전에 출입을 금지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샤를로트가 구스타프 3세의 아들인 구스타프 아돌프의 출생에 대해서 소문을 퍼트린 사람중 한명이었기 때문인듯합니다. 구스타프 3세는 샤를로트를 왕위계승자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린것에 대해서 체포하라고 명령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구스타프 3세는 아내인 소피아 마그달레나와의 사이에서 오래도록 자녀를 낳지 못했는데 갑자기 결혼 8년만에 아들이 태어나면서 그 아들이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 국왕의 시종무관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결국 국왕의 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 왕비가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조사하도록 만들었으며 결국 국왕 부부가 국왕의 시종무관과 시녀에게서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왕부부의 체면을 구긴 사건으로 발전합니다.)

 

구스타프 3세, 칼 13세의 형

 

이후 샤를로트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거주하게 됩니다. 1784년 구스타프 3세가 프랑스를 방문했을때, 그녀를 사모했던 사람중 한명이었던 구스타프 모리츠 암펠트 백작이 국왕과 샤를로트의 만남을 주선했고 샤를로트는 국왕에게 스웨덴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이탈리아등을 여행하고 난뒤 1786년 샤를로트는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그녀는 각국 대사들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정보를 빼내는 스파이 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샤를로트는 1790년 사망했는데 이때 그녀는 네덜란드 대사의 정부였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