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 가문 할것 정말 많은데 초기부터 이렇게 말이 많군요.아하하
지금 머리 아파 죽을것같은데 글을 읽으려니 힘드네요 엉엉엉..ㅠ.ㅠ
유럽의 통치 가문들...(33) 벨프 가문 : 스폴레토 공작과 투스카나의 마르크그라프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10세는 장인인 황제 로타르 3세(또는 2세)에 매우 충성스러운 신하였으며 로타르 3세는 외동딸의 남편이었던 이 하인리히 10세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특히 하인리히 10세는 로타르 3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참했으며, 이때 그는 토스카나 마르크그라프령을 얻어냈고 또 장인인 로타르 3세의 영지였던 작센 공작령의 후계자로 확정되었습니다.그래서 하인리히 10세는 토스카나의 마르크그라프와 스폴레토 공작 지위도 얻게 된것입니다.
(스폴레토 공작령은 토스카나의 마르크그라프의 지배를 받던 곳이었기에 두 지위를 동시에 얻게 된것입니다.)
하지만 하인리히 10세는 장인이 죽은뒤 독일의 국왕으로 선출된 콘라트 3세와 마찰을 빚었으며 콘라트 3세는 상위 군주로 하인리히 10세의 모든 영지를 뺏어버리게 됩니다. 하인리히 10세는 장인으로부터 상속을 받은 작센 공작령에서 기반이 강했었기에 작센을 장악했으며 이어서 바이에른도 공격하려다가 사망했고, 그가 죽었을때 미성년인 아들인 하인리히(하인리히 데어 뢰베)밖에 없었기에 그의 영지는 모두 가문의 손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데어 뢰베는 미성년이었기에 아마도 상속받은 영지 모두를 되찾을수는 없었고 협상을 통해서 바이에른 공작령과 다른 지역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작센 공작령만을 겨우 지키게 됩니다.
이때 토스카나의 마르크그라프령과 스폴레토 공작령은 콘라트 3세의 측근 신하였던 아템스의 울리히에게 돌아가게 되죠. 하지만 벨프 가문 역시 이 지역을 포기한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 9세의 아들이자 하인리히 10세의 동생이며 또 하인리히 데어 뢰베의 숙부였던 벨프는 슈바벤 지역에 있던 가족의 상속영지를 물려받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형과 함께 콘라트 3세에 대항했던 인물이었죠. 비록 1142년 십자군전쟁에 벨프와 그의 아들은 국왕 콘라트 3세와 함께 참전하기도 했었지만 기본적으로 둘은 서로 앙숙이었으며.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뒤에 다시 적대적 상황이 되었으며 전쟁을 합니다. 특히 1150년 플로흐베르크 전투에서 콘라트의 후계자였던 하인히리 베렌가르가 벨프 부자에게 승리를 거뒀지만 그 자신은 전사면서 정치적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인리히 베렌가르가 사망하고, 콘라트 3세에게는 어린 아들인 프리드리히 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그가 죽은뒤 그의 지위를 어린 아들이 아니라 콘라트 3세의 조카였던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가 물려받는 계기가 됩니다. 이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는 콘라트 3세의 조카였을뿐만 아니라 벨프의 외조카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때문에 벨프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를 지지했으며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는 사촌에게 바이에른 공작령을 돌려줬을뿐 아니라, 외삼촌인 벨프에게는 이전 벨프 가문의 이탈리아쪽 영지였던 토스카나의 마르크그라프령과 스폴레토 공작령을 부여했습니다. 이렇게 벨프는 토스카나의 마르크그라프와 스폴레토 공작인 벨프 6세가 됩니다.
벨프 6세에게는 아들인 벨프가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와 함께 전투에 참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벨프 6세는 이탈리아쪽 영지를 아들에게 주고 자신은 독일쪽 영지를 관리했었죠. 하지만 벨프 6세의 아들인 벨프 7세는 후계자 없이 아버지보다 일찍인 1167년 말라리아로 사망하게 됩니다.
벨프 6세의 아들이 죽자 하인리히 데어 뢰베는 후계자 없는 숙부의 뒤를 자신이 이어야한다고 주장했었죠. 이에 벨프 6세는 상속을 댓가로 돈을 요구했었다고 합니다만, 하인리히는 돈을 주지 않았고 결국 벨프 6세는 자신의 이탈리아쪽 영지를 황제에게 되돌려주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일쪽 상속영지는 조카에게 상속하기로 했었습니다.)
이렇게 토스카나의 마르크그라프령과 스폴레토 공작령은 벨프가문의 손을 떠나게 됩니다.
더하기
벨프 6세가 조카인 하인리히 데어 뢰베에게 주었던 슈바벤 지역의 상속 영지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와 하인리히 데어 뢰베의 갈등으로 인해서 결국 다시 벨프 6세에게 돌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영지는 벨프 6세가 죽은뒤 누나인 바이에른의 유디트의 후손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유디트의 아들이 바로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였기에 결국 슈바벤의 남은 지역 모두가 슈바벤 공작이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소유가 된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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