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있는글들/금요일 : 유럽의 통치 가문들

유럽의 통치 가문들...(32) 벨프 가문 : 바이에른과 작센 공작

엘아라 2020. 11. 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유럽의 통치 가문들...(32) 벨프 가문 : 바이에른과 작센 공작 

 

하인리히 9세가 장남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로타르의 딸과 결혼시키면서 그를 황제로 지지했었습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9세의 아들이었던 하인리히 10세가 자형인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2세의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장인인 황제 로타르 2세 사이에서 장인인 로타르 2세(또는 로타르 3세)를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덕분에 하인리히 10세는 황제와 함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해서 이탈리아쪽의 영지였던 토스카나와 스폴렛토 영지를 얻게 됩니다. 또 그해 장인이 죽으면서 아내를 통해서 장인의 영지였던 작센 공작 지위도 차지하게 되죠.

 

황제 로타르 2세, 하인리히 10세의 장인

 

세개 공작령의 공작이된 하인리히 10세는 아마도 당대 가장 강력한 인물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당연히 야심을 가지게 되었을 듯합니다. 하지만 독일의 귀족들은 하인리히 10세보다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하인리히 10세의 장인인 로타르와 대립했던 콘라트를 지지했으며 결국 그를 독일 왕 콘라트 3세로 선출합니다.

하인리히 10세는 처음에는 새로 국왕이 된 콘라트 3세에게 자신의 영지들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바이에른은 물론 작센과 이탈리아쪽 영지까지 가지게 되면 하인리히 10세의 영지가 너무 커지기에 콘라트는 이를 거절하죠. 결국 하인리히 10세 콘라트에게 충성맹세를 거부합니다. 이에 콘라트 3세는 독일의 국왕으로 그의 봉신이었던 하인리히 10세의 영지를 뺏어버리게 됩니다. 바이에른은 이복동생이었던 바벤베르크 가문 출신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4세에게 주었으며 작센 지역은 벨프 가문 이전에 바이에른을 통치했던 마지막 공작의 외손자였던 브란덴부르크의 마르크그라프였던 알브레히트(알브레히트 데어 바)에게 줘버리게 됩니다. 또 이탈리아쪽 공작령 역시 가신중 한명에게 줘버리게되죠.

하인리히 10세는 바이에른은 뺏겼지만 작센지방을 버티고 가지고 있었으며 (아마 그의 아내가 작센 공작의 상속녀였기에 가능했을 듯합니다.) 작센을 성공적으로 방어한뒤 바이에른을 공격하려고 시도하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독일의 국왕 콘라트 3세, 호엔슈타우펜의 콘라트 

 

하인리히 10세가 죽은뒤 그의 외아들로 "사자공the lion,der lowe"라는 별명을 가졌던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했지만 그는 미성년자였던데다가 그의 아버지의 영지는 공식적으로 모두 뺏긴상태였었습니다.  하지만 작센은 여전히 그의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인 게르트루드가 아들을 대신해서 섭정으로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또 외할머니인 노르테임의 리헨차가 외손자를 위해서 콘라트 3세와 중재를 하게 됩니다. 리헨차는 황후였었으며 비록 남편이 죽긴했지만 황제가 없는 상황에서 황후라는 그녀의 지위는 무시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하인리히 데어 뢰베가 바이에른 공작령에 대한 상속을 포기하는 대신 작센의 상속권을 인정받았으며, 하인리히 데어 뢰베의 어머니였던 게르트루드가 콘라트 3세의 이복동생으로 형 레오폴트의 뒤를 이어서 바이에른 공작이 된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와 결혼했었습니다. (아마도 하인리히 데어 뢰베는 어머니의 상속권리를 인정받은듯한데, 이때문에 바이에른 공작과 게르트루드가 결혼해서 태어난 아이들 역시 작센의 공작령을 인정받을수 있기에 아마 이런 협정을 맺은듯합니다. 하지만 게르트루드는 재혼한 다음해인 1143년 딸을 낳고나서 사망합니다.)

 

게르트루트와 테오도라 콤네나,,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부인들

 

어머니가 죽고 난뒤,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와의 동맹은 끝났으며 하인리히 데어 뢰벤은 성인으로 성장했고 강력한 기사가 됩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에도 참전했었는데 특히 콘라트 3세가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려했을때 자신의 아들에게 미리 독일 왕 지위를 물려주려했었습니다. 이때를 이용해서 하인리히는 바이에른 공작령에 대한 상속권리를 주장했었으며 계속 이런 상황을 유지했었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십자군 전쟁때문에 잠시 미뤄지게 되죠.

 

하인리히 데어 뢰베 (사자공 하인리히)

 

콘라트 3세가 죽은뒤, 그의 지위는 그의 어린 아들인 프리드리히가 아니라 조카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에게 돌아갑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는 콘라트 3세의 조카였을뿐만 아니라 하인리히 데어 뢰벤의 고종사촌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인리히는 이 고종사촌과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황제가 되었을때 그에게 충성을 하죠. 결국 하인리히는 1156년 바이에른 공작령도 되찾게 됩니다. 하지만 황제와 가까운점이 좋은것만은 아니었는데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와 하인리히의 처가가 대립하자, 결국 황제의 압력으로 아내와 헤어져야했다고 합니다. 첫번째 아내와 헤어진후 그는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딸로 할머니 마틸다 황후의 이름을 딴 잉글랜드의 마틸다와 재혼하게 됩니다. 이 마틸다와의 사이에서 여러 아들들이 태어났으며 이후 벨프가문의 후손들은 모두 이들의 자손들이었습니다.

 

하인리히 데어 뢰베와 잉글랜드의 마틸다의 결혼식

 

하지만 결국 하인리히 데어 뢰벤과 하인리히 바르바롯사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1180년 하인리히는 황제에게 모든 영지를 뺏기고 추방당하게 됩니다. 그는 장인의 통치 지역이었던 노르망디로 갔으며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게 됩니다. 1189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가 십자군 전쟁을 떠난 틈을 타서 작센으로 돌아왔으며  뤼네부르크 인근의 부유한 도시였던 바르도바이크를 장악했습니다. 이후 황제의 아들이었던 오토가 그를 다시 물리치긴 했지만 결국 1194년 하인리히가 죽기전 황제 하인리히 6세와 화해했으며, 브라운슈바이크 인근의 지역을 통치 지역으로 인정받았으며 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헐 이래서 이 가문이 브라운슈바이크 지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군요. --;;;)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