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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30) 바이에른의 공작 벨프 1세 : 벨프 가문의 선조

엘아라 2020. 10. 2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제가 중세 유럽사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을 잘 모르거든요.

아시다시피 제가 주로 파는 곳이 영국 아니면 스웨덴인데 거기가 뭐랄까 변방이잖습니까 ㅠ.ㅠ

그런데 이렇게 떡하니 신성로마제국과 연결되는 가문 이야기를 쓰려니 주변 상황을 이해해야해서 진짜 엄청나게 읽어야하네요 흑.....ㅠ.ㅠ 

 

이렇게 읽어놓으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것이긴합니다만....... 당장은 힘들어요 엉엉엉...

 

유럽의 통치 가문들...(30) 바이에른의 공작 벨프 1세 : 벨프 가문의 선조

 

 

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

벨프 가문으로는 벨프 4세

Welf I 

(c. 1035/1040 – 6 November 1101)

 

 

에스테 가문 출신으로 독일쪽 벨프 가문의 선조가 되는 벨프는 외삼촌인 카린시아 공작 벨프 3세가 후손없이 사망하자 그의 영지를 이어받게 됩니다. 이때문에 그는 독일쪽으로 가게 되죠. 그리고 역시 독일쪽 귀족이었던 노르드하임의 오도의 딸인 에델린데와 결혼하면서 완전히 독일쪽에서 정착하게 됩니다. 재미난 것은 벨프의 아버지였던 알베르토 아초 2세는 교황을 지지했었지만 독일에 있던 벨프는 독일의 황제를 지지하게 된다고 합니다. 

 

벨프 1세의 부모, 알베르토 아초 2세와 쿠니쿤데

 

벨프는 황제 하인히리 4세를 지지했었으며 아마 이것은 그가 당시 하인리히 4세의 측근이으로 바이에른 공작이었던 노르트하임의 오토의 딸과 결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토아 하인리히 4세가 갈등을 빚으면서 벨프는 하인리히 4세를 지지했고 결국 1070년 하인리히 4세는 오토의 바이에른 공작 지위를 뺏아서 벨프에게 줬으며, 벨프는 정치적 갈등으로 아내와 이혼하게 됩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

 

하지만 벨프 1세는 서임권투쟁이 일어나던 시기 편을 바꾸어서 황제가 아니라 황제에 반대하고 교황을 지지하던 라인펠덴의 루돌프를 지지하게 됩니다. 아마 이것이 그가 바이에른 공작 지위를 다시 뺏기는 원인이 되었을 듯합니다. 1077년 황제는 그에게서 바이에른 공작 지위를 뺏습니다. 하지만 벨프 1세는 자신의 영지에서 버틸수 있었는데 충직한 그의 바이에른 신하들이 그를 따랐으며 이탈리아에서 아버지 알베르토 아초 2세가 역시 그를 지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벨프 1세 역시 자신의 영지에서 교회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원치는 않았습니다만 일단은 교황을 지지하는 측에 가담했었기에 한동안 정치적 상황을 황제에 적대하는 상황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1095년 그는 다시 황제와 화해하고 황제를 지지하게 되었으며 그는 다시 바이에른 공작 지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그의 후손들이 한동안 바이에른 공작 지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두번째 아내인 유디트와 함께 있는 벨프 1세

 

1097년 알베르토 아초 2세가 죽으면서 이탈리아쪽 영지는 벨프의 동생인 풀코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에 벨프는 반발했으며 무력으로 이탈리아쪽 영지를 장악하려했습니다만 성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은 이전의 서임권을 두고 교황과 황제가 세력다툼을 하던것과 연결이 될듯합니다. 이탈리아는 어쨌든 황제보다 교황의 영향력이 더 컸으며 이런 상황에서 황제파인 벨프가 영지를 차지하는 것은 어려웠을 듯합니다.

 

1099년 벨프 1세는 1101년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불리던 십자군 전쟁에 참전합니다. 이 십자군 전쟁은 1차 십자군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구성된 것이었지만 실패로 돌아갔으며 엄청난 패배를 당했었다고 합니다. 벨프 1세 역시 간신히 목숨만 구했었지만 결국 바이에른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했었습니다.

 

1101년의 십자군 상황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