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번외편8. 나탈리야 파블로브나 팔레이 (첫번째)

엘아라 2020. 9.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나탈리야는 영화배우로 활동해서 그런지 내용이 많네요. -0-;;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번외편8. 나탈리야 파블로브나 팔레이 (첫번째)

 

나탈리야 파블로브나 팔레이

Princess Natalia Pavlovna Paley 

Наталья Павловна Палей;

(5 December 1905 – 27 December 1981) 

 

나탈리야 파블로브나 팔레이는 1905년 파리에서 러시아의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그의 두번째아내인 올가 카리노비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부모는 황제로부터 결혼을 허락받지 않고 결혼했기에 러시아에서 추방당해있었습니다. 파벨대공은 두번째 아내와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서 바이에른으로부터 호헨펠센 백작/여백작 지위를 얻도록 했었으며 이때문에 나탈리야는 처음에는 나탈리야 파블로브나 폰 호헨펠센 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파벨 대공은 비록 러시아에서 추방당했지만 당대 유럽에서 제일 부유했다는 러시아 대공답게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편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나탈리야는 언니 오빠와 부모와 함께 파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부모와 언니오빠 그리고 외가쪽 친척들과 함께 있는 나탈리야

 

나탈리야의 삶이 크게 변하기 시작한것은 1912년이었습니다.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숙부가 허락없이 결혼한 것을 용서했으며 나탈리야의 부모의 결혼을 인정해줍니다. 이제 결혼을 인정받았기에 파벨 대공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러시아로 돌아오게 되죠.나탈리야는 러시아로 돌아와서 보지 못했던 친척들을 만나게 됩니다. 친가 친척들은 물론 외가 친척들과 러시아에 살고 있던 이복 언니 오빠도 만나게 되었으며 가족들과 가깝게 지내게 됩니다.

 

니콜라이 2세는 1915년에는 나탈리야의 어머니에게 "팔레이 공비"라는 칭호를 부여해주었으며 이후 나탈리야와 나탈리야의 언니 오빠는 이제 팔레이라는 성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나탈리야 역시 나탈리야 파블로브나 팔레이 공녀라고 불리게 되죠. 이것은 러시아에서 팔레이 가문을 인정한것으로 나탈리야의 오빠인 블라디미르는 다른 황족들처럼 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러시아에서 나탈리야의 부모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러시아의 상황은 혼란해지는데 파벨 대공과 팔레이 공비는 러시아를 떠나지 않고 그냥 머물기로 합니다. 아마도 겨우 러시아로 돌아왔는데 다시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도 있었을 것이며 파벨 대공의 병세도 악화되었기 때문일듯합니다. 볼셰비키들이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파벨 대공의 가족들은 더이상 자신의 집에 머물수 없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했었습니다.

 

1918년이 되자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모든 러시아 황실 가족의 남자들은 체포되었는데 거기에는 나탈리야의 오빠인 블라디미르도 있었죠. 파벨 대공은 바로 체포되지는 않았는데 그가 매우 아팠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니콜라이 2세가 살해당하고 블라디미르가 살해당한후 파벨 대공도 체포당합니다. 나탈리야는 언니와 함께 아버지를 면회가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언니 이리나와 함께 있는 나탈리야

 

상황이 악화되자 어머니인 팔레이 공비는 딸들의 안위를 걱정해서 일단 딸들이라고 피신시키려합니다. 그리고 나탈리야와 이리나는 고생고생끝에 핀란드로 갔으며 부모가 오길 기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벨 대공은 결국 볼셰비키에 의해서 처형당했으며 팔레이 공비는 남편이 살해당한뒤 역시 핀란드로 갔었습니다.

 

나탈리야는 언니와 어머니와 함께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으로 갔었습니다. 사실 핀란드는 당시 러시아의 황제가 통치하던 지역이었고 혁명에 휩쌓이는 것을 피할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아마도안전을 위해서 스웨덴으로 간것일듯합니다. 그리고 일을 지켜보다가  집과 재산이 남아있는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