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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의 인판타들...(44) 나바라의 카타리나 : 레오노르의 손녀 (첫번째)

엘아라 2020. 8. 1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딸들 대충 다하고 손녀들이야기하는데 손녀들이 둘입니다. 하나는 나바라의 왕위를 얻는 카타리나고 다른 한명은 페르난도 2세의 왕비가 되는 제르멘입니다. 음냐.... 일단 카타리나 하고 나서 제르멘을 할까합니다. -0-;;;;

 

나바라의 인판타들...(44) 나바라의 카타리나 : 레오노르의 손녀(첫번째)

 

나바라의 카타리나

Catherine 

(Basque: Katalina, Occitan: Catarina;)

1468 – 12 February 1517)

 

나바라의 카타리나(카탈리나)는 1468년 나바라의 레오노르와 그녀의 남편인 푸아 백작 가스통의 장남이었던 비아나 공 가스통과 그의 아내로 프랑스의 샤를 7세의 딸인 마들렌 드 발루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카타리나의 아버지인 가스통은 나바라 군주의 후계자가 갖는 칭호인 비아나 공 칭호를 가졌지만 나바라의 국왕이었던 외할아버지는 물론 왕위계승자였던 어머니보다도 일찍 사망했었습니다. 

카타리나의 증조할머니는 나바라의 여왕이었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아라곤의 국왕이 되는 인물이었죠. 할머니인 레오노르는 나바라의 왕위를 얻었지만 며칠 살지 못하고 사망했었습니다. 레오노르가 죽은뒤  레오노르의 손자이자 카타리나의 오빠였던 프란시스코 페부스가 나바라의 국왕이 됩니다. 하지만 그 역시 1483년 미혼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카타리나의 오빠, 프란시스코 페부스, 나바라의 국왕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카타리나는 오빠 다음으로 왕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미성년이었으며 이때문에 이전에 이미 아들의 섭정으로 일했었던 어머니 마들렌이 역시 카타리나의 섭정으로 정치에 나서게 되죠. 카타리나가 여왕이 되었을때 카타리나의 숙부였던 후안(장 드 푸아)는 살리카 법에 따라서 조카인 카타리나가 아니라 자신의 국왕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나바라에서는 살리카법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푸아 가문에서는 살리카법을 인정했었기에 이 상황은 아마도 나바라에서 서로 지지세력간에 내전으로 발전되게 했을 것입니다.

 

내전이 시작되자, 카타리나의 어머니인 마들렌은 딸인 카타리나를 서둘러 결혼시킵니다. 카타리나가 결혼을 하는 것은 많은 부분에서 카타리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데 카타리나가 결혼해서 그녀의 남편이 카타리나를 대신해서 그녀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수 있었으며, 또 카타리나의 시집이 원조를 해줄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계자를 얻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었죠.

 

카타리나의 어머니 마들렌

 

카타리나의 남편이 된 인물은 장 달브레로 알브레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알브레 가문은 중세 프랑스에서 강력한 귀족가문중 하나였었습니다. 특히 카타리나의 시이버지인 알랭 달브레는 야망이 큰 인물로 그는 한때 브르타뉴 지역을 장악해서 통치자가 되길 원했었고 브르타뉴 공작령의 상속녀인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길 원했었고 전쟁까지 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신에 자녀들을 통치 가문의 사람과 통혼시키려했었죠. 아들인 장을 나바라의 여왕인 카타리나와 결혼시켰을뿐만 아니라 딸인 샤를로트는 체사레 보르지아와 결혼시켰었습니다.

 

알브레 가문의 문장

 

카타리나는 1486년 장 달브레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정식으로 대관식을 하게 된것은 1494년이 되어서야였습니다.  내전은 1492년에서야 끝났으며  카타리나의 어머니인 마들렌은 오래도록 섭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바라 왕위를 노리던 루이스 데 보몬트가 계속 이들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루이스 데 보몬트는 2대 레린 백작으로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계 나바라의 귀족이었습니다. 루이스의 어머니인 후아나 데 나바라는 카를로스 3세의 사생아 딸이었었죠. 이것은 루이스 데 보몬트가 나바라의 왕가의후손임을 주장할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특히 그는 나바라의 왕위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던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루이는 아라곤의 국왕 후안 2세의 사생아 딸인 레오노르 데 아라곤과 결혼을 해서 아라곤 왕가와의 결속을 더 강화했었죠. 게다가 페르난도 2세의 아내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죽고 난뒤, 페르난도 2세와 사위인 펠리페 1세(후아나 라  로카의 남편인 미남왕 필리프)가 갈등을 빚을때 페르난도 2세를 강력히 지지했었던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루이스 데 보몬트의 방해는 아마도 오래도록 카타리나와 그녀의 남편인 장 달브레가 대관식을 미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