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프랑스

마자리네트와 그 후손들...(18) 외젠 드 사부아 : 올림피아 만치니의 아들(세번째)

엘아라 2019. 5. 3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정말 한일 많은 사람은 읽을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흑


마자리네트와 그 후손들...(18) 외젠 드 사부아 : 올림피아 만치니의 아들(세번째)




외젠 드 사부아

오이겐 폰 사보이엔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

Prince Eugene of Savoy

 Eugène Eugen von Savoyen Eugenio

(18 October 1663 – 21 April 1736)



외젠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한 이유는 다시 오스만제국과의 갈등때문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쪽 영지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과 국경이 맞닿아있었으며 이것은 오스만제국과의 갈등을 지속시키는 것중 하나였습니다. 이미 시작부터 군사국가였던 오스만제국은 이교도와의 투쟁을 통한 국가의 확장이 중요한 목표중하나였습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을 중심으로하는 기독교도들 역시 이교도와의 투쟁이 중요했었죠. 그리고 복잡한 정치상황을 거쳐서 1716년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황제 카를 6세는 외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그리고 외젠은 이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게 되죠. 적군의 총사령관이 전사하기도 했으며 여러 지역에서 오스만제국군이 패배했기에 결국 헝가리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낼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국의 승리이자 외젠의 승리로 외젠의 이름을 더욱더 크게 떨칠수 있었습니다.


1717년 벨가드 전투에서의 외젠


외젠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를 진행하고 있던 동안 서유럽쪽에서는 또 다른 전쟁의 기운이 피어오르게 됩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은 결국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물론 에스파냐 왕위계승권을 가진 사람이 프랑스 왕위계승권리를 포기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어서 두 나라가 합병되는 것만은 막았습니다. 문제는 펠리페 5세가 이제 에스파냐 국왕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영지였던 합스부르크령네덜란드(현재 벨기에)나 이탈리아 지역의 상속을 주장한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파르마 공작의 상속녀였던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와결혼하면서 파르마 공작령을 비롯한 이탈리아 지역 통치를 주장하기도 했었죠. 이것은 이탈리아 지역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제국을 자극하는 일이기도 했었죠. 결국 에스파냐를 상대로 영국,프랑스,네덜란드 공화국,신성로마제국이 동맹을 맺어서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재미난 것은 프랑스가 반 에스파냐 진영에 가담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국왕은 겨우 펠리페 5세의 조카였던 루이 15세였는데 그가 즉위할때 루이 14세의 직계는 그를 제외하고는 펠리페 5세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만약 어린 루이 15세가 사망할경우 프랑스 왕위계승은 오를레앙 가문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펠리페 5세가 민감하게 반응했었는데 이에 대해서 프랑스쪽에서 경계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에서 외젠은 이전만큼 활약하지 못하는데 프랑스군이 에스파냐로 진격하고 영국 해군이 에스파냐 해군에 우세했던것에 반해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외젠은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정치적 문제와 평화협정을 거친 후에 이탈리아 지역들이 에스파냐 부르봉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카를 6세는 이탈리아쪽 지배권을 원했었기에 외젠에 대한 신뢰가 점차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황제 카를 6세


이후 외젠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총독이 되었지만 그가 총독령에서 독자적 통치를 한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빈의 정부의 정책에 따라야만했는데 이것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불만을 가중시키는 것이기도 했으며 결국 그는 네덜란드 총독직에서 강제로 물러나야했다고 합니다. 외젠의 지위를 생각해서 황제는 외젠에게 여러가지 명예지위와 연금을 부여했지만 이번의 실패는 외젠의 정치적 영향력에 치명적이었으며 외젠은 병까지 얻어서 건강도 매우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외젠이 서서히 다시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았지만 이때는 외교적으로 매우 복잡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트 파르네세는 여전히 자신의 파르마 계승권리는 물론 자녀들의 계승권리에 집착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적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모색하고 있었죠. 이런 상황은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잉글랜드)가 서로 손을 잡는 계기가 됩니다. 또 카를 6세는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확정하기 위해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많은 부분을 양보하기까지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는 결국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외젠이 마지막으로 참전한 전쟁도 이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이었죠. 이때 외젠은 더이상 뛰어난 명장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에 의해서 외젠에게 보내져서 함께 외젠과 함께 전쟁에 참전했던 젊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자(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대왕)은 외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었지만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당시 외젠에 대해서 "몸은 여전했지만 영혼은 없는것 같았다"라고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외젠은 아마도 이전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에 직면해야했고(이를테면 동맹이었던 영국이 대놓고 테클을 걸어대는데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었습니다.) 이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서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성과를 얻을수 있었던 것에 반해서 이번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을 듯합니다.



외젠


외젠은 오스트리아 귀족여성이었던 엘레오노라 바티아니 백작영애와 오랜 관계였다고 합니다. 둘은 20년 이상을 함께했으며 엘레오노라는 외젠이 죽을때까지 함께했었으며 외젠의 주변에서는 그녀를 외젠의 "공식연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외젠은 오래도록 동성연애자라는 이야기가 퍼져있었으며 당대 기록등에서도 이에 대해서 쉽게 찾아볼수 있었다고 합니다.


외젠은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기에 그의 엄청난 재산은 조카와 그 후손들에게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일찍 사망했으며 결국 외젠의 가문에서 남성후계자가 단절되게 됩니다. 외젠은 결국 남아있는 조카였던 사보이의 마리아 빅토리아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줬었는데, 마리아 빅토리아는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아서 그 재산을 모두 팔았으며 그녀 역시 후손없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외젠의 예술품은 사르데냐의 국왕에게 팔렸으며, 외젠의 책들과 문서등은 황제가 구입했었다고 합니다.



외젠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