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정복왕 윌리엄 이전의 잉글랜드 왕비들..(12) 노르망디의 에마 : 애설레드의 왕비(첫번째)

엘아라 2019. 2.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이 엠마에 대해서 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진짜 어디 전기나 책을 좀 찾아보고 엠마에 대해서 글을써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아하하..-0-;;;

책만 찾으면 내년 새해특집은 엠마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하하..-0-;;;


정복왕 윌리엄 이전의 잉글랜드 왕비들..(12) 노르망디의 에마 : 애설레드의 왕비(첫번째)



노르망디의 엠마

잉글랜드의 왕비

Emma of Normandy

 (c. 985 – 6 March 1052)


애설레드의 두번째 아내가 되는 여성은 노르망디의 에마로 그녀와 애설레드의 결혼은 완전히 정치적 문제였습니다. 그녀가 강력한 노르망디 공작의 딸이자 여동생이었다는 이유때문이었는데 이런 상황은 잉글랜드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맞물려서 그녀가 두명의 잉글랜드 국왕과 결혼해서 두명의 잉글랜드 국왕의 어머니가 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그의 오빠의 후손인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노르망디의 에마는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리샤르 1세(리샤르 샹 푀르)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군노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리샤르 1세와 군노라의 결혼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전해져오는데 원래 리샤르 1세는 프랑크 공작이자 파리 백작인 휴의 딸인 에마와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자녀가 없었고 968년 자녀없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후 리샤르 1세는 다른 신붓감을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과 함께할 다른 여성은 찾았던듯합니다. 한 덴마크쪽 출신의 여성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지만 유부녀였던 그녀는 리샤르를  거절하는 대신 미혼이었던 자신의 여동생인 군노라를 소개시켜줬고 군노라는 그의 정부가 되었죠. 그후에 자녀들이 태어났는데 리샤르는 군노라와 정식으로 결혼하면서 자녀들을 적자로 인정받게 했다고 합니다.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와 그 자녀들


사실상 군노라는 덴마크쪽 바이킹 세력의 딸로 리샤르 1세와 적대적인 세력에 속해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샤르와 군노라의 결혼으로 리샤르는 군노라쪽 집안의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군노라의 집안은 노르망디에서 중요 귀족가문으로 자리잡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합니다.



군노라

에마의 어머니

 

에마는 중세의 많은 여성들처럼 어린시절의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평범한 가문으로 시집갔다면 그녀에 대한 기록은 많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적 목적으로 잉글랜드의 국왕과 결혼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녀에 대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노르망디 공작령은 강력한 군사 세력이었던 바이킹이 내려와서 나라를 세운 곳중 하나였습니다. 노르망디 공작령을 세운 인물은 전설적인 바이킹이었던 롤로로, 에마는 그의 증손녀였죠. 이들 세력은 같은 바이킹들이었던 데인인들등과 협력하거나 경쟁관계를 통해서 성장했었는데, 특히 프랑스 왕국와 협렵을 통해서 자신의 영지를 확보해서 성장해나갔고 다른 바이킹 세력들과 경쟁을 통해서 지위를 굳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노르망디 공작의 대외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죠.



롤로

노르망디 공작령을 세운 인물

에마의 증조부

정복왕 윌리엄의 조상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데인인이라고 불리던 덴마크쪽 바이킹의 침입을 받고 있었으며 이들과의 투쟁은 점차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가 성립된 이유중 하나가 바이킹의 거센 침입에 앵글로-섹슨족이 하나로 뭉쳐야한다는 관념이 포함될정도였죠. 전쟁을 하거나 회유하는 등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점차 침입한 바이킹에게 바쳐야할 돈이 점차 감당할수 없을 정도였죠. 애설레드시기에 이르러서는 결국 데인인들과 결판을 내야할 지경에 이르게 되죠. 


애설레드는 데인인들과의 경쟁을 위해서 외교 관계를 이용하려했고 여기에는 노르망디 공작과의 동맹이 포함되게 됩니다. 노르망디에 살던 바이킹의 후예였던 노르만인들은 역시나 다른 바이킹들처럼 뛰어난 전투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력도 컸기에 무시할수 없는 이들이었고 이들과 동맹을 맺는 것은 잉글랜드에 유리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리샤르 2세는 엠마의 오빠였는데 그 역시 잉글랜드와의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적은 하나라도 줄이는 것이 좋았기에 결국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는 동맹을 맺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 리샤르 2세의 여동생인 엠마가 1002년 잉글랜드의 국왕인 애설레드에게 시집오게 되죠.



에마와 두 조카들과 함께 있는 노르망디의 리샤르 2세


결혼식때 엠마는 잉글랜드식 이름으로 "앨프기푸"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데 이 이름은 애설레드의 첫번째 아내 이름과 같은 것이었다고도 합니다. 엠마는 애설레드와의 사이에서 에드워드, 앨프레드 애설링,고드기푸 세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노르웨와 덴마크의 국왕이자 강력한 노르드인중 한명이었던 스웨인 포크비어드(스베인 하랄드손)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그리고 1013년 스웨인은 애설레드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명서 무력으로 잉글랜드를 차지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엠마는 아이들과 함께 친정인 노르망디로 피신했고, 그녀의 남편인 애설레드 역시 노르망디로 건너가죠. 애설레드와 엠마에게는 다행한 일로 1014년 스웨인이 사망하면서 노르드인 세력들은 약화되었고 다시 애설레드와 엠마가 돌아올수 있게 됩니다. 


스웨인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스베인



애설레드와 엠마는 잉글랜드에 돌아왔지만 애설레드의 아들인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엠마의 아들들보다 왕위계승권이 높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이 왕위계승자가 되길 원했지만 에드먼드는 이에 반발했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투쟁 관계중에 다시 노르드 세력이 침공하죠. 스웨인의 아들로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데인인의 지지를 받았던 크누트가 잉글랜드를 1015년 침공했으며 잉글랜드는 다시 혼란해집니다. 그리고 이런 왕위계승투쟁은 일단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막을 내리고 1016년 애설레드가 사망하면서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왕위에 오르면서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크누트와의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제 크누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크누트 대왕


엠마는 남편이 죽고 나서 아이들과 함께 런던에 있었으며, 복잡한 정치 상황때문에 크누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