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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인판타들...(72) 마리아 2세 : 페드루 4세의 딸(세번째)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마리아 다 글로리아
포르투갈의 여왕
Maria II of Portugal
(4 April 1819 – 15 November 1853)
Maria da Glória Joana Carlota Leopoldina da Cruz Francisca Xavier de Paula Isidora Micaela Gabriela Rafaela Gonzaga
마리아 2세는 아버지인 페드루가 살아있었다면 결혼에 대해서 느긋하게 생각 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페드루는 그녀가 왕위를 되찾지 육개월되 되지 않은 1834년 9월 사망합니다. 이 상황은 결국 마리아 2세의 남편감을 서둘러 찾게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까운데서 남편을 찾게 되죠.
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트(프랑스 식으로는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는 마리아 2세의 새어머니였던 아말리 황후의 오빠로 황후가 브라질로 갔을때 따라갔었습니다. 이때 마리아 2세 역시 브라질로 갔었기에 아마도 그녀는 아우구스트를 이미 알게 되었을 것이며, 아우구스트는 페드루 1세가 퇴위하고 유럽으로 돌아올때까지 브라질에 있다가 함께 유럽으로 돌아왔었습니다. 그렇기에 아우구스트와 마리아 2세는 서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인연과 그의 독특한 지위때문에 주변 국가에서 그가 여왕의 남편이 되는 것에 호의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트는 나폴레옹의 양자이자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아들인 외젠 드 보아르네와 그의 부인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친가는 프랑스의 귀족가문일뿐이었지만 그의 외가는 바이에른 왕가로 유럽의 여러 왕가들과 혼인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이모들은 오스트리아 황후,프로이센 왕비, 작센의 왕비들, 오스트리 황제의 어머니, 오스트리아 황후의 어머니등이 되는 사람들이었죠. 게다가 그의 큰누나인 요세피나는 스웨덴 왕위계승자와 결혼했고, 그의 여동생은 브라질 황후 뿐만 아니라 독일의 여러 왕가로 시집가게 됩니다. 그리고 막내 동생은 후에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의 딸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와 결혼하기 까지 하죠. 이런 친척관계는 그가 비록 유럽의 주요한 통치 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통치가문과 친인척 관계를 형성하게 만들었으며 여왕의 남편감으로 매우 이상적으로 보였습니다.
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트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
아우구스트는 1834년 12월 마리아와 뮌헨에서 대리 결혼을 했으며 1835년 1월 24살의 아우구스트와 15살의 마리아 2세는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오래가지 않는데 아우구스트는 결혼한지 겨우 2달만인 1835년 3월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죽음이 너무 갑작스럽고 병이 급히 진행되었기에 포르투갈에서는 그가 독살당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트
아마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마리아는 아직 후계자를 임신하지도 못했었기에 서둘러 남편감을 찾는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녀는 아직 나이가 어렸고 후계자도 없었기에 여전히 포르투갈의 국왕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미겔을 견제해야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또 국정에 도움을 줄만한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찾은 신랑감은 역시 첫번째 남편처럼 여러 왕가와 친인척관계인 인물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페르디난트였습니다. 그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헝가리쪽 분가사람이었습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의 외가이자 앨버트 공의 친가였었죠. 이때문에 페르디난트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사촌이었습니다. 또 벨기에 국왕이었던 레오폴 1세의 조카이기도 했었죠. 그의 여동생인 빅토리아는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의 아들인 느무르 공작과 결혼해서 느무르 공작부인이 되었으며 그의 조카는 후에 불가리아의 국왕이 되는 인물입니다. 페르디난트의 어머니는 헝가리의 코하리 가문의 상속녀였고 이때문에 페르디난트의 집안을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페르디난트
어쨌든 페르디난트 역시 유럽에서 힘있는 통치가문 출신은 아니었지만 영국,프랑스,벨기에 왕가와 친인척관계였기에 여왕의 남편감으로 괜찮다고 여겨졌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영국과 긴밀한 동맹이었는데 당시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추정왕위계승자이긴했지만 이미 그녀가 영국의 왕위를 이을것을 모두 알고 있었고 이때문에 영국 왕위계승자의 사촌과 결혼하는 것은 포르투갈에 도움이 되리라 여겨졌을 것입니다.
1836년 마리아 2세는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페르디난트와 결혼했으며 결혼 다음해인 1837년 아들이자 후계자인 페드루를 낳습니다. 페드루가 태어난뒤 페르디난트는 포르투갈의 관습에 따라 마리아 2세와 공동 국왕으로 인정받았으며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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