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인판타들...(71) 마리아 2세 : 페드루 4세의 딸(두번째)

엘아라 2018. 12. 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브라질 공주들을 먼저할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포르투갈의 인판타들인데 브라질은 별개 나라니까요..

하지만 페드루 2세의 후손들이 별로 없어서 흠...고민이군요.


포르투갈의 인판타들...(71) 마리아 2세 : 페드루 4세의 딸(두번째)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마리아 다 글로리아

포르투갈의 여왕

Maria II of Portugal

 (4 April 1819 – 15 November 1853) 

 Maria da Glória Joana Carlota Leopoldina da Cruz Francisca Xavier de Paula Isidora Micaela Gabriela Rafaela Gonzaga



1829년 마리아 2세는 새어머니가 될 아멜리 드 보아르네와 함께 브라질로 갔으며 포르투갈은 아소르스 제도의 세번째 큰 섬인 테세이라만이 유일하게 자유주의자들이 임시정부를 구성해서 마리아 2세를 군주로 인정하고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국제 관계도 마리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는데 외가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숙부인 미겔을 지지하는 메테르니히가 있었고, 영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공공연하게 미겔에 호의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역시 미겔을 인정하려했었습니다.



메테르니히



하지만 이런 상황은 브라질 내의 정치 상황이 급변하면서 다시 바뀌게 됩니다. 마리아 2세의 아버지였던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는 브라질 내에서 여러가지 실정을 하게 됩니다. 브라질인들은 차별에 민감했는데 페드루 1세의 측근들은 주로 포르투갈 본토 출신이 많았으며 정치적 갈등을 빚던 브라질 출신들과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이들은 황제의 측근임을 과시하면서 세력을 과시했고 이것은 브라질인들에게 거북하게 다가왔었습니다. 게다가 남미에서의 군사 원정의 실패 역시 페드루 1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으며 특히 대중들은 페드루 1세의 복잡한 개인 사생활 역시 황제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 황후인 마리아 레오폴지나가 죽은뒤 황후가 황제의 폭력때문에 유산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안그래도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이들이 더욱더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결국 1831년 페드루 1세는 다섯살인 아들 페드루에게 양위하고는 아내와 함께 브라질을 떠나게 됩니다. 브라질에서 퇴위한 페드루 1세는 다시 눈을 포르투갈로 돌리게 됩니다. 그는 딸을 위해서 양위했을뿐이었으며 당연히 그의 딸인 마리아가 포르투갈의 정당한 국왕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미겔은 딸에게서 왕위를 뺏았을뿐었죠. 게다가 정치적 성향도 페드루 1세는 자유주의자였으며 미겔을 보수주의자였기에 그는 포르투갈에서 딸의 왕위를 되찾는데 주력하기로 결심합니다.



페드루 1세의 양위


페드루는 유럽으로 갔고 이제 그는 스스로를 "브라간사 공작"이라고 칭했으며 딸인 마리아 2세의 섭정으로 딸의 권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는 딸의 권리를 위해서 유럽의 여러나라들과 외교적 협상을 하는데 사실 미성년자였던 마리아 2세보다 페드루가 나서는 것이 훨씬 더 정치적으로 유리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페드루는 스스로 딸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여러가지 노력을 했었으며 심지어 아소르스 제도로 가서 자유주의자들과 합류했으며 포르투갈의 내전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마리아 2세는 여성에 미성년이었기에 페드루는 딸을 두번째 아내와  함께 파리에 있게 했고 마리아 2세는 포르투갈 내전기간동안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아버지 

페드루 1세& 페드루 4세

브라간사 공작, 마리아의 섭정



결국 이 내전은 마리아 2세를 지지하는 페드루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미겔은 1834년 퇴위해야했습니다. 마리아는 당연히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서 왕위를 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인 페드루는 국왕이 아닌 딸 마리아의 섭정이 되죠. 하지만 이 상황은 오래 가지 못하는데 아버지인 페드루의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페드루는 아마도 브라질 황제에서 물러 난뒤 딸의 왕위를 되찾는것이 최대의 목표였을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그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최선을 다했었죠. 하지만 거의 성공에 이른 1834년에는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 특히 결핵이 있었던 그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을 했기에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고 딸이 왕위를 되찾은 그해인 1834년 9월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상황은 미성년인 여왕에게 정치적 도움을 줄 남편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