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오랫만에 글을 쓰는듯해요..ㅠ.ㅠ
포르투갈의 인판타들.,,(19)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 페르난두 1세의 딸 (첫번째)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비
포르투갈 왕위계승 요구자
Beatrice
( 7–13 February 1373 – c. 1420)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는 포르투갈의 국왕 페르난두 1세와 그의 아내였던 레오노르 텔레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베아트리스의 형제 자매들은 어려서 사망했고, 베아트리스만이 유일하게 성인으로 성장했는데 이 상황은 복잡한 포르투갈의 정치 상황과 연결되어서 왕위계승 문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사실 페르난두 1세의 아버지였던 페드루 1세는 이녜스 데 카스트로와의 사랑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르난두는 페드루 1세의 부인인 콘스탄사 마누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페드루 1세의 적자였기에 확고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혼 문제는 복잡한 포르투갈의 정치를 혼란하게 했고 페르난두 1세의 이복동생들이자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아들들이 포르투갈에서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베아트리스의 아버지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1세
페르난두 1세는 카스티야나 아라곤과의 동맹이나 평화 협정을 위해 그곳의 인판타들과 혼담이 오고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유부녀에게 마음을 뺏겼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동맹 혼담을 깨버리기 까지 합니다. 페르난두 1세가 반한 여성은 레오노르 텔레스라는 여성이었죠. 그녀는 포르투갈 귀족의 딸로 역시 포르투갈 귀족의 아내였습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알려져있었는데 이런 그녀에게 반한 페르난두 1세는 레오노르의 결혼을 무효화 시켰고, 자신의 동맹 혼담을 깨고 결혼식을 강행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반발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결혼이후 레오노르의 친정식구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국왕의 이복동생들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게 됩니다. 왜냐면 그들의 어머니였던 이녜스 데 카스트로가 살해당한 이유가 친정식구들이 권력을 잡을 것을 우려해서였는데, 정작 이복형은 자신의 처가식구들이 권력을 손에 쥐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레오노르와 페르난두 1세
결혼초 베아트리스가 태어난뒤 오래도록 페르난두 1세와 레오노르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습니다.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뒤 두 아이가 태어나지만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망하게 되죠.막내가 태어났을때 페르난두 1세는 오래도록 앓고 있었고 삶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베아트리스의 지위는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베아트리스는 태어난 직후부터 외교 동맹의 대상으로 혼담이 오가게 됩니다. 이것은 페르난두 1세가 카스티야 왕위계승 문제에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카스티야의 국왕인 페드로 1세는 이복동생인 엔리케 2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에 페드로 1세의 두 딸들은 자신들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하면서 엔리케 2세에게 대항했고 둘다 잉글랜드 왕가로 시집가면서 잉글랜드가 역시 카스티야 왕위계승 전쟁에 개입하는 계기가 됩니다. 특히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은 페드로 1세의 장녀인 콘스탄사와 결혼해서 스스로 카스티야의 국왕임을 자처하면서 내전에 참전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엔리케 2세는 적자가 아니었고, 페드로 1세의 두 딸들 역시 적자 지위가 애매했습니다.이 문제에 페르난두 1세는 자신의 할머니가 카스티야의 공주였으며 어머니 역시 카스티야 왕가의 후손으로 둘다 적자임을 내세워서 자신이 카스티야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고 이에 카스티야와 전쟁을 했었습니다. 세번에 걸친 전쟁중 두번째 전쟁 직후 태어났던 베아트리스는 평화조약의 일환으로 카스티야의 국왕 엔리케 2세의 사생아 아들로 막 베나벤테 공작의 지위를 받았던 아들 파드리케 데 카스티야와 약혼했었습니다.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를 살해하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
1376년 약혼식이 치뤄졌지만, 1379년 카스티야의 국왕 엔리케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후안 1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됩니다. 베아트리스는 의회에서 페르난두 1세의 상속녀로 인정받았기에 그때까지도 아들이 없었던 페르난두 1세의 유일한 적자 후계자로 포르투갈의 상속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1세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자신의 이복동생에게 넘기길 바라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 역시 포르투갈에서는 이점을 노려서 후안 1세의 어린 아들인 엔리케(후에 국왕 엔리케 3세)와 베아트리스와의 결혼 협상을 다시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1380년 이 혼담은 다시 의회의 승인을 받게 됩니다.
베아트리스는 결국 카스티야의 왕비가 될 운명이긴 했지만 엔리케의 아내가 될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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