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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왕비들...(93)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7세의 왕비(네번째)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7세의 왕비
Elizabeth of York
(11 February 1466 – 11 February 1503)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이자 남동생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여성중 한명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헨리 튜더가 랭카스터 가문의 권리를 통해서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할수도 있었지만 그 권리는 아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권리에 비하면 매우 미약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만약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한다면 비록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결합이라는 주장을 할수는 있어도 아내의 계승권에 의지한다면 다시 반란이 일어날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뒀을것입니다. 이때문에 그는 스스로의 권리를 강하게 내세우는데 헨리 튜더는 리처드 3세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서 잉글랜드 왕위를 얻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치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국왕 해롤드를 무찌르고 잉글랜드 왕위를 얻은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기 전 먼저 자신의 대관식을 치뤄서 국왕이 된뒤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
이제 국왕 헨리 7세가 된 헨리 튜더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듭니다. 그는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국왕의 적자임을 확인시켰으며,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정당한것이라 선언했습니다. 이때문에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다시 궁정에서 "왕비"로써의 대접을 받게 됩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헨리 7세와 1486년 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결혼했으며, 그해 9월에 아들인 아서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1487년 11월 잉글랜드의 왕비로 대관하게 됩니다. 보통 결혼과 동시에 대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아들을 낳은 한참 뒤에 대관식을 치루는 것으로 봐서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계승권이 자신의 왕권에 영향을 준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헨리 7세의 의도가 들어간 것이 아닐까합니다.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그리고 자녀들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의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습니다만 둘은 점차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성품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헨리 7세는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망명생활을 해야했습니다. 그리고 헨리 7세가 늘 존경했던 어머니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매우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으며 아들이 국왕이 된 뒤에는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온화하며 너그러운 성품이었다고 알려진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자신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궁정을 장악했던 시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왕비로써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았고 시어머니의 뜻을 존중했었습니다.
또 아마도 아버지가 죽기전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었던 엘리자베스는 남편에게도 그런 생활을 가져다 줬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는데 더 집중했으며, 이런 생활은 유복자로 태어나 어린시절 강제로 어머니와 떨어졌으며 오랜 망명생활을 했던 헨리 7세에게 안정적 가정생활을 경험할수 있게 해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비록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궁정내에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에게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게 해줬을 것입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
1501년 엘리자베스와 헨리 7세의 아들인 아서가 가톨릭 공동 군주의 막내딸이었던 아라곤의 카타리나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아서는 결혼 육개월도 되지 않아서 사망했습니다. 장남이자 후계자가 될 아들의 죽음에 헨리 7세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이런 남편에게 헨리 7세는 외아들이었지만 결국 살아남아서 국왕이 되었지 않으냐고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에게는 아직 아이들이 있으며 또 다른 아이들을 낳을 만큼 젊으니 너무 절망에 빠지지 말라고 위로했었다고 합니다.
1503년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말대로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합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그녀의 막내아이가 됩니다. 1503년 2월 2일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딸인 캐서린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얼마 살지 못하죠. 그리고 엘리자베스 역시 2월 11일 사망합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죽음은 헨리 7세와 자녀들에게 매우 큰 슬픔으로 남게 됩니다. 아마도 헨리 7세는 자신에게 가정의 행복을 알려준 아내의 죽음에 상심했었을 것입니다. 아내가 죽은 직후 헨리 7세는 매우 아팠는데 그때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외에는 어떤 사람도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아직 어리던 엘리자베스의 아이들 역시 어머니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내의 상중에 있는 헨리 7세
비록 정치적 목적으로 헨리 7세는 재혼을 고려했고 여러 후보자들을 거론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했던 아내를 늘 잊지 않았는데 아내가 죽은 기일에 교회에서 종을 울렸으며 초를 기부해서 아내를 기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은뒤 아내와 함깨 묻혔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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