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82) 엘리자베스 우드빌 : 에드워드 4세의 왕비(아홉번째)

엘아라 2016. 9. 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렇게 쓰다가는 올해내로 잉글랜드 왕비 못끝내겠습니다.-0-;;

다음이 앤 네빌인데 네빌가문이야기만해도..-0-;;;하여튼 앤 네빌도 다섯편은 될거라 그럼 10월인데...

다음으로는 요크의 엘리자베스 해야되고 그 다음은 헨리 8세의 여섯왕비들 해야하니까...

내년 봄에도 안끝날듯하네요=0=

열심히 해봐야겠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이거 끝나면 자료없는 정복왕 이전시대의 잉글랜드 말고 스코틀랜드를 할까 싶습니다만 이 스코틀랜드도 또 언제를 기점으로 해야할지 고민입니다. 음냐...-0-;;;

나름 영국사를 좀 팠다고 생각했는데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의 정복왕 이전 시대로 가니까 하나도 모르겠네요 -0-;;


잉글랜드의 왕비들...(82) 엘리자베스 우드빌 : 에드워드 4세의 왕비(아홉번째)




엘리자베스 우드빌

데임 엘리자베스 그레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왕비

Elizabeth Woodville 

(also spelled WydvilleWydeville, or Widvile; c. 1437 – 8 June 1492) 

20세기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두번의 결혼을 통해서 모두 열두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첫번째 결혼으로 두명의 아들을 낳았으며, 두번째 결혼으로 열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중 아홉명의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첫번째 남편인 존 그레이와의 사이에서 두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첫째는 후에 1대 도싯 후작이 되는 토마스 그레이입니다. 그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영향아래서 엑서터 공작의 상속녀였던 레이디 앤 홀랜드와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후손없이 사망했으며 다시 한번 상속녀와 재혼합니다. 그의 두번째 아내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로 알려진 해링턴 여남작 시슬리 본빌이었습니다. 둘사이에서는 일곱명의 아들과 일곱명의 딸이 태어나는데, 둘째아들인 2대 도싯 후작 토마스 그레이의 장남인 헨리 그레이는 서퍽 공작인 찰스 브랜든과 헨리 7세의 딸인 메리 튜더의 장녀인 프랜시스 브랜든과 결혼했고 둘의 첫째딸이 바로 레이디 제인 그레이였습니다.

둘째는 리처드 그레이로, 그는 리처드 3세에 의해 외삼촌인 앤서니 우드빌과 함께 체포된뒤 처형당했습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로 추정되는 초상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남이었던 토마스 그레이의 증손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두번째 남편인 에드워드 4세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영유아기를 넘긴 아이들은 모두 일곱명이었으며 두명의 아들들이 바로 "사라진 왕자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다섯딸들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첫째아이는 바로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였습니다.

"페어리 베스"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녀는 아마도 브리튼 섬 최고의 미녀라는 평가를 들었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닮았던듯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헨리 7세와 결혼해서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죠. 아들인 헨리는 헨리 8세가 되었으며 딸인 마거릿과 메리는 각각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왕비가 되었습니다. 마거릿은 두번의 결혼을 통해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그녀의 남편인 단리경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되었고 결국 둘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메리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세와 결혼했었고 그가 죽은뒤 찰스 브랜든과 재혼했고, 둘의 외손녀중 한명이 바로 레이디 제인 그레이입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

요크 가문의 상징인 흰장미를 들고 있습니다.


둘째아이는 요크의 메리입니다. 요크의 메리는 윈저성에서 태어난것과 대부모중 한명이 부처 추기경이었다는 것외에는 많이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한때 덴마크의 국왕이자 칼마르 동맹의 국왕이기도 한 요한과 혼담이 오갔다고 합니다만 성사되지는 않았습니다. 요크의 메리는 아버지가 죽기 한해전에 14살의 나이로 사망했었습니다. 훗날 그녀의 관은 우연하게 발견되는데,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묘지가 갑작스럽게 파괴되었고 이때 작은 어린아이 관 두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관중 하나가 메리의 관이었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메리의 관을 열었을때, 옅은 금발의 푸른 눈을 한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 그대로의 메리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공기중에 닿자 곧 재로 변했다고 합니다.(...-0-;;별로 안 믿기는...) 어쨌든 현재에도 이 두개의 관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요크의 메리


셋째아이는 딸인 요크의 시슬리입니다. 아마도 이 이름은 친할머니인 시슬리 네빌의 이름을 딴것일듯합니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4세 생전에 시슬리는 제임스 3세의 아들인 스코틀랜드의 왕위계승자와 혼담이 오갔었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이 혼담은 인기가 없었으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혼담은 없던 일이 됩니다. 이후 제임스 3세의 동생이자 스코틀랜드 왕위를 노리던 알바니 공작 알렉산더 스튜어트와 약혼합니다만, 결혼전 그가 전투에서 살해당합니다. 그리고 이후 아버지인 에드워드 4세가 죽은뒤 그녀의 삶은 바뀌게 됩니다.리처드 3세가 즉위한뒤 시슬리는 리처드 3세의 지지자중 한명이었던 랄프 스크롭과 결혼합니다만, 이 결혼은 후에 형부인 헨리 7세에 의해서 무효가 됩니다. 이후 그녀는 존 웰레즈 자작과 결혼합니다. 존 웰레즈의 어머니는 블랫소의 마거릿 보챔프로 바로 헨리 7세의 외할머니였고, 존 웰레즈는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이부동생으로 결국 헨리 7세의 외삼촌이었습니다. 두번째 남편과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 모두가 미리 죽고 난뒤 시슬리는 세번째 결혼을 합니다. 세번째 남편은 토마스 킴이라고 불리던 인물로 시슬리는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결혼했으며 세번째 남편은 공주의 남편이 되기에는 신분이 딸렸던듯합니다. 시슬리의 결혼은 형부인 헨리 7세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헨리 7세는 처제를 궁정에서 추방했다고 합니다. 시슬리를 예뻐했던 국왕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가 중재해서 겨우 재산을 다시 돌려받았지만 남편이나 둘의 자식들에게는 상속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시슬리는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크의 시슬리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tained_glass_in_the_Burrell_CollectionDSCF0301_07.JPG


넷째아이는 아들인 에드워드 5세 입니다. 에드워드 5세는 아버지가 부르고뉴로 망명했을때 웨스트민스터의 성역권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온뒤 왕위계승자인 웨일즈 공 칭호를 부여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때이른 죽음은 결국 숙부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즉위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와 그의 동생인 리처드는 런던탑에 갇혀있었는데,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아마도 많은 이들이 리처드나 그의 측근에 의해서 살해당했을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에드워드 5세


다섯째아이는 딸인 마거릿인데 태어난지 일년을 못넘기고 사망했습니다.


여섯째아이는 아들인 리처드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은뒤 요크 공작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장남은 뺏겼지만 둘째아들인 리처드와 딸들 모두를 데리고 성역권으로 도망갔었습니다.하지만 둘째아들인 리처드를 내줘야했다고 합니다. 그는 형과 함께 런던탑에 갇혔으며 형과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훗날 찰스 2세때 아이들의 유골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견했으며 찰스 2세는 이를 에드워드와 리처드로 생각해서 장례를 치뤘다고 합니다만 20세기에 들어서서 재확인했을때 유골이 아이들의 유골의 완전한 유골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다른 동물의 뼈까지 섞여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아이들의 유골이 어디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많다고 합니다.



런던탑의 두 왕자들

19세기 작품



일곱째는 딸인 앤입니다. 에드워드 4세는 앤이 다섯살때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막시밀리안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그의 장남인 필립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었습니다. 이때 부르고뉴 공작령에 대해서 프랑스가 계속적으로 독립을 원치 않았으며 이에 대해서 무력을 사용하려했었을때 잉글랜드가 도움을 줬었기에 이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맺으려 한것이라 추측할수 있습니다. 또 이것은 필립의 어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사랑했던 새어머니인 요크의 마거릿이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이었던 것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의 죽음으로 이 결혼은 성사되지 못하죠. 대신 앤은 리처드 3세 시절에 서리 백작(후에 노퍽공작)의 아들이었던 토마스 하워드와 약혼합니다. 이 혼담은 리처드 3세와 하워드 가문 사이의 우호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리처드 3세가 몰락한 뒤에도 하워드 가문에서는 이 약혼이 지켜져야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앤은 토마스 하워드와 결혼합니다. 이후 하워드 가문은 튜더 왕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문이었으며 앤 역시 여전히 왕실 가족들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녀의 조카인 헨리 8세는 즉위후 이모를 위해 영지등을 하사하기도 했었습니다. 1511년 앤은 사망하는데, 앤과 토마스 하워드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녀들은 없었으며 결국 토마스 하워드는 재혼해서 후손들이 있었습니다. 앤의 남편인 토마스 하워드는 헨리 8세의 두번째 부인인 앤 불린의 외삼촌이었으며, 다섯번째 부인인 캐서린 하워드의 백부였습니다.


여덟째는 아들인 조지였습니다. 조지는 태어난 직후 베드포드 공작 지위를 받게 됩니다만 2살때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아홉째는 딸인 요크의 캐서린이었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직후 에드워드 4세는 캐서린은 가톨릭 공동 군주의 아들이었던 후안과 결혼시키길 원했습니다. 두 나라간에 결혼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에드워드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 혼담을 끝나게 만들었습니다. 후에 캐서린의 형부인 헨리 7세는 처제를 스코틀랜드로 시집보내려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3세의 둘째아들인 로스 공작 제임스 스튜어트와 캐서린을 결혼시키려했습니다만 제임스 3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이 혼담 역시 없었던 일이 됩니다. 후에 캐서린은 데본 백작이 되는 윌리엄 코트니와 결혼합니다. 재미난 것은 윌리엄 코트니가 복잡한 상속문제 때문에 아버지 데본 백작의 지위를 이어받지 못하게 되자, 국왕이었던 헨리 8세는 이모부를 위해 데본 백작지위를 부여해줬었습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명의 아이를 얻었지만 31살의 나이로 과부가 된 캐서린은 이후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고 합니다. 재미난 것은 캐서린의 딸인 레이디 마거릿 코트니는 보퍼트 가문의 서자였던 찰스 서머셋의 장남인 헨리 서머셋과 결혼했습니다. 



요크의 캐서린


열째는 딸인 요크의 브리짓입니다. 브리짓의 이름은 스웨덴의 왕비이자 성녀였던 성 브리짓의 이름을 딴 것이었습니다. 중세시대 많은 고위층 부모들처럼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자녀들중 한명을 하느님을 섬기게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막내딸인 브리짓이 선택됩니다.그리고 브리짓은 수녀로써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속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정리한것은 아니었으며 언니인 엘리자베스와 함께 자주 있었는데, 왕비였던 언니 엘리자베스는 동생의 여러 일에 금전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수녀가 되는 브리짓 공주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두번의 결혼을 통해서 많은 아이들이 있었으며 특히 큰딸인 엘리자베스를 통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왕들 그리고 훗날 영국(UK)의 국왕들의 선조가 됩니다. 또 여러 결혼 관계를 통해서 유럽의 여러 왕가들의 선조가 되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