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야기/음악이야기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드" : 요한나 마리아 린드

엘아라 2015. 1. 3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이야기에 나오는 가수인 제리 린드에 대해서 잠깐 읽었답니다.ㅎㅎㅎㅎㅎ

왜 뜬금없이 린드 이야기냐구요..


10월에 안네 조피 폰 오터가 오는데 그분이 이 린드와 연관된 아리아를 레퍼토리로 한다네요.

음냐... 이분 자루스키랑 줄리오 체사레에 나왔을때 노래를 좀 찾아들었었는데 괜찮더라구요. 그래도 그냥 쿨하게 안갈려고 했는데 하필 제니 린드라고 해서 고민중이라죠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드" : 요한나 마리아 린드


제니 린드

요한나 마리아 린드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Johanna Maria Lind 
Jenny Lind,
Swedish Nightingale"
(6 October 1820 – 2 November 1887)


"제니 린드"라는 예명으로 더 잘알려진 스웨덴의 요한나 마리아 린드는 사생아로 태어났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유부녀였는데 린드의 아버지를 만나 린드를 낳았었죠. 부모는 종교적 이유로 린드의 어머니의 전 남편이 죽을때까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며, 린드가 14살때가 되어서야 정식으로 결혼했었습니다.

린드의 재능이 처음 알려진것은 그녀가 9살때였다고 합니다. 우연히 스웨덴 왕실 오페라단의 발레리나였던 여성이 그녀의 노래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린드의 노래를 들었던 발레리나는 매우 놀랐고, 그녀는 린드가 가수로써 성장할수 있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린드는 12살의 나이로 데뷔했었으며 이후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서 "아가테"역할을 맡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린드가 20살때 그녀는 스웨덴 왕립 음악학회의 회원이자 궁정 가수가 되었었죠. 하지만 린드는 이때쯤 제대로 된 테크닉을 익히지 못해서 매우 목소리가 매우 상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목소리를 구해준것이 바로 마누엘 그라치아였다고 합니다.


마누엘 그라치아

에스파냐 출신의 가수이자 음악 교육가이며 성악교육학자였습니다.
그는 후두경을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으로도 알려져있습니다.

파리에서 마누엘 그라치아에게서 훈련을 받으면서 목소리를 되찾은 린드는 파리 국립 오페라단에서 노래 불러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갔으며 그라치아의 방법을 좀더 발전시켜서 자신의 목소리를 훈련시켰습니다. 
린드는 덴마크로 공연을 갔었고 그곳에서 유명한 동화작가였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을 만나게 됩니다. 안데르센은 린드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린드는 그와 좋은 친구 사이만 유지했었죠. 안데르센의 동화들중 몇몇은 이 린드에게 영감을 얻어서 쓴것이라고 알려져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데르센의 동화인 "눈의 여왕"은 안데르센이 린드에게 거절당한뒤 쓴 동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안데르센


1844년 린드는 베를린에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에서 주연인 노르마 역을 맡습니다. 이후 그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공연을 하게 됩니다. 이동안 그녀는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도 있때 얻게 됩니다. 또 린드는 자선공연을 해서 수익금을 모두 기부에 쓰는 등의 일을 했기에 이런 그녀의 모습은 음악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샀었다고 합니다.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의 성공으로 많은 팬들과 황실가족들의 호의를 얻게된 린드는 1847년 영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공연을 했으며 빅토리아 여왕 역시 린드의 팬이 됩니다. 린드는 2년간 영국에서 오페라를 불렀지만 1849년 오페라에서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녀의 은퇴공연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왕실 가족들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린드


린드는 멘델스존과 매우 가까운 친구사이였다고 알려져있었다고 합니다만 사실상 둘의 사이는 더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린드는 1847년에 멘델스존이 사망했을때 매우 큰 충격을 받았으며 1848년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장학금 기금을 만들게 됩니다. 사실 멘델스존의 이름을 딴 학교를 라이프치히에 세우고 싶었지만 자금이 모자랐고 결국 장학기금을 조성하게 된것이었습니다.


멘델스존

문득 경악스러운 바그너가 떠오릅니다. 그냥 친구 딸네미 꼬셔서 결혼한 이야기만 알았는데 바그너가 베토벤 빠돌이였다는 사실에 좀 충격이었드랬죠-0-;;;;;; 


린드는 1850년대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금전적 문제로 린드는 자선사업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린드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갔었는데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녀의 콘서트 티켓은 경매에서 거래될정도였으며 그녀에 열광하는 사람들인 "린드마니아"라는 사람들이 생길정도였죠. 미국에서의 성공은 린드에게 엄청난 경제적 이득이 되었는데 2년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93번의 공연을 했으며 린드의 수익은 현재 가치로 약 천만달러정도의 수익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물론 그녀를 초빙한 기획자는 더 많이 벌었습니다.) 린드는 미국에서 독일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였던 오토 골드스미트와 결혼했었습니다.

미국에서의 린드의 인기를 묘사한 그림


1852년 미국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린드와 그녀의 남펴는 처음에는 드레스덴에 살았지만 곧 다시 영국으로 가게 됩니다. 린드는 오페라 무대에 서달라는 제의는 모두 거절했지만 콘서트는 지속적으로 했었습니다. 1883년 완전히 은퇴할때까지 린드는 콘서트 무대에서 자주 노래를 불었다고 합니다. 


린드와 그녀의 남편


1870년대 린드는 음악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닉스가 쇼팽의 전기를 집필하는데 도움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1882년에는 새로생긴 왕립음악학교의 성악 교수가 되었었죠.1883년 자선 음악회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린드는 더이상 공적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887년 사망했었습니다.


은퇴한 뒤의 린드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