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있는글들/역사이야기

Queen Victorias : 빅토리아 왕비들

엘아라 2012. 12. 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ㅎㅎㅎ 메와르 이야기 살짝 접었습니다.

전쟁이야기도 싫고 정치이야기도 싫어요--;;;

라즈싱에 대해서 읽고 있는데 이눔의 책들이나 연구 결과가 1920년대랑 1970년대랑 2010년대이야기들이 조금씩 달라서 난감합니다.

그결과 글 구성을 못하겠습니다..이런이런...


인도사 책을 읽어야겠어요.흑..ㅠ.ㅠ


결국 뭘 할까 고민하다가 "빅토리아 왕비"에 대해서 생각해볼까합니다.

Queen Victoria는 네명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명만 여왕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왕비였다죠.

(우리나라는 Queen을 "여왕"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있었는데 이 경우만 봐도 왕비인 Victoria가 압도적으로 많죠. 단 여왕인 빅토리아가 제일 유명하긴하죠..ㅠ.ㅠ)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 이야기는 썼으니 빅토리아 왕비 이야기를 모아볼까합니다.

(사실 어디 찾아보면 다 있는 이야기라죠..-0-;; 결국은 글쓰기 싫어서 대충 날로 먹겠다는 이야기입니다.)


Queen Victorias : 빅토리아 왕비들


서유럽에서 Queen Victoria라는 사람들은 네명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 여왕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이었을듯합니다. 상대적으로 빅토리아 왕비들은 잘 안 알려져있습니다.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있지만 빅토리아 여왕정도는 아니라죠. 어쨌든 이 세명의 빅토리아 왕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합니다.


첫번째로 다룰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였던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입니다.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프로이센의 왕비이자 독일 제국의 황후가 되었죠.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독일의 황후

프로이센의 왕비

Victoria, Princess Royal 

(Victoria Adelaide Mary Louisa)

( 21 November 1840 – 5 August 1901)



영국 국왕의 장녀로 "프린세스 로열"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태어난 빅토리아 여왕의 큰딸이자 첫째아이는 어머니와외할머니의이름인 빅토리아를 물려받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애칭으로 "빅키"라고 불렸었죠.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자신의 첫째딸에 반해버렸고 너무나 소중하게 아이를 키웠습니다. 빅키는 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아이가 되었고 여왕 자신이 딸에게 질투심을 느낄정도였다고 합니다.

매우 총명했었던 빅키는 가장 사랑받는 딸 답게 아버지를 가장 잘 이해하는 딸로 성장합니다.

빅키는 12살 되던해에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프로이센의 왕위계승자가 될 프리드리히 왕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1855년 열네살의 빅키는 24살의 프리드리히 왕자와 약혼합니다만 빅키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공식 발표는 1857년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열일곱살이었던 1858년 프리드리히 왕자와 결혼합니다.

빅키와 프리드리히(가족들은 "프리츠"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는 매우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둘의 결혼은 정략결혼인긴했지만 긴 약혼기간동안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죠.(..하지만 지금 기준으로는 범죄라는..--;;)



빅키와 프리츠

윈저로 신혼여행갔을때


빅키는 프로이센 궁정에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합니다. 프로이센 궁정에서는 빅키와 남편 프리츠의 정치적 사상(자유주의)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으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빅키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궁정에서는 빅키에 대해서 "그 영국 여자"라고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남편과 행복했지만 자녀문제들로는 매우 힘들었는데 첫아이이자 아들이었던 빌헬름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빌헬름은 태어날때 거꾸로 있다는것이 밝혀졌고(아이는 원래 머리가 아래로 있어야 쉽게 나오는데 거꾸로 나오게 되면 아기의 어깨가 엄마 골반에 걸려서 둘다 사망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빅키와 아이 모두 위험할 지경에 이르자 결국 의사가 아기의 왼쪽팔을 부러뜨려서 꺼내서 겨우 살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문에 빌헬름은 평생 왼손을 쓸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살아남은 아들들은 어머니와 정치적 견해가 달랐으며, 딸들만이 위안이 되는 사이였습니다. 특히 장남인 빌헬름과는 사이가 멀었는데 빌헬름은 할아버지에 의해 교육받아서 보수주의자로 성장해서 어머니와 정치적 성향이 달랐으며, 아들의 장애에 죄책감을 가지고 아들을 닥달한 부모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뉘신가 그러시더라구요 빌헬름은 스스로 장애를 이겨내려했고 거의 이겨낸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부모가 그걸 인정하지 않고 아들을 닥달해서 어쩌면 빌헬름이 더 좌절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구요.)



빅키와 프리츠

그리고 자녀들


빅키의 남편인 프리드리히는 황제가 된지 며칠 되지 않아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인 빌헬름이 즉위했습니다만, 그는 어머니에 대해서 매우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방을 뒤져서 서류들을 찾으려 했었다고 합니다.(..물론 문서들은 모두 영국에 가 있었다고)

빅키는 빌헬름과 딸들인 조피,빅토리아,마르가레타가 사이가 나빠진것에 가슴아파했으며 서로를 중재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었습니다만, 스스로도 빌헬름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죠.

빅키는 유방암을 진단받았고 어머니가 죽은 몇달후인 1901년 사망했습니다. 빅키는 암으로 매우 고통스러워했는데 시종들은 빅키가 밤마다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너무 힘들어 했고 이때문에 될수 있는대로 빅키의 방에 가까이 가려하지 않을정도였다고 합니다.



1900년경의 빅키



두번째로 다룰 사람은 바덴의 빅토리아 입니다. 바덴의 빅토리아는 스웨덴의 왕비가 되죠.





바덴의 빅토리아

스웨덴의 왕비

Victoria of Baden 

(Sophie Marie Viktoria)

( 7 August 1862 – 4 April 1930) 


바덴의 빅토리아는 바덴 대공인 프리드리히 1세와 그의 부인인 프로이센의 루이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루이제는 독일의 빌헬름 1세의 딸이자 프리드리히 3세의 동생이었죠. 재미난것은 루이제는 한때 스웨덴의 칼 15세와 혼담이 오갔었다는것입니다. 약혼이 거의 성사단계였는데 칼 15세가 일방적으로 깼고 그녀는 바덴 대공가로 시집갔었다고 합니다.

바덴의 빅토리아는 여러번의 혼담이 있었습니다만, 1881년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인 구스타프(후에 구스타프 5세)와 결혼하게 됩니다. 둘은 빅토리아의 사촌인 독일의 빌헬름(후에 빌헬름 2세)의 결혼식에서 만났으며 곧 약혼하게 되죠.

이 결혼은 스웨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는데 바덴의 빅토리아가 이전 스웨덴 왕가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빅토리아의 할머니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딸로, 빅토리아는 스웨덴 왕가의 후손이기도 했었죠.  이때문에 이 결혼은 스웨덴 왕실로써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는데, 이후 스웨덴의 국왕들은 이전 국왕들과 혈연적으로도 연결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빅토리아와 구스타프


빅토리아와 구스타프의 결혼생활을 행복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둘은 거의 떨어져 살았으며 빅토리아의 건강상태가 매우 나빴고 스웨덴의 추운 날씨는 빅토리아가 견디기 힘들었기에 거의 지중해나 아프리카쪽에서 지냈었습니다.

빅토리아는 스웨덴 왕비들중 가장 재능을 많이 가졌던 왕비로 알려져있습니다.그녀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는데 바그너를 피아노로 칠정도였으며, 사진찍는것 역시 거의 작가 수준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이런 그녀의 재능은 아들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물려받았죠. 하지만 빅토리아는 정치에 강하게 개입했으며 남편에게 친독일 성향을 심어줬기에 스웨덴에서 그다지 인기는 없는 왕비가 됩니다. (게다가 스웨덴에서 오래 머물지도 않았었죠.) 



빅토리아 왕비

1928년경



마지막으로 할 사람은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입니다. 가족들에게는 주로 "에나"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스페인의 알폰소 13세의 왕비가 되었고 에스파냐에서는 "빅토리아 에우헤니아"왕비로 알려져있습니다.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

에스파냐의 왕비

Princess Victoria Eugenie of Battenberg 

(Victoria Eugenie Julia Ena)

 (24 October 1887 – 15 April 1969)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는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와 그의 부인인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하인리히는 잘생기기로 이름 높았던 바텐베르크 가문의 셋째아들이었으며 베아트리스 공주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이었죠. 빅토리아 여왕은 이 막내딸을 움켜쥐고 살았는데 이때문에 하인리히는 모든걸 포기하고 베아트리스와 빅토리아 여왕 곁에서 살아야했습니다. 이때문에 에나는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살았었죠.

에나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긴 했지만 귀천상혼한 가문 출신이었기에 대가문의 왕가와 연결될 가능성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운명은 알폰소 13세가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오면서 바뀌게 됩니다. 에드워드 7세는 조카들을 유럽의 왕위계승자와 결혼시키길 원했고, 알폰소 13세도 조카들중 한명(특히 코넛 공작의 딸이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의 딸)과 결혼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알폰소 13세가 반한 사람은 에나였죠. 금발머리에 키크고 우아했던 에나에게 알폰소 13세는 반해버렸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결혼에는 많은 반대가 있었죠.

가장 큰 이유는 에나가 "귀천상혼한 가문"출신으로 에스파냐 왕비가 되기에는 신분이 너무 낮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에나의 가계에 있는 유전병인 혈우병이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첫번째는 조카를 왕비로 밀어넣기 위해 에드워드 7세가 해결해줍니다. 두번째는 사랑에 빠진 알폰소 13세가 개의치 않아했죠.



알폰소 13세


1906년 에나는 마드리드에서 알폰소 13세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결혼식날 신랑신부를 향해 폭탄테러가 일어났고 에나와 알폰소 13세는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폭탄테러는 에나와 알폰소 13세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한 전주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결혼 초 부부는 행복했지만, 혈우병을 가진 아들이 태어나자 알폰소 13세는 아들에게 병을 물려준 아내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궁정에서도 영국 여성이었던 에나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었다고 하죠. 특히 1차대전동안에는 에나와 시어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폰소 13세는 수많은 연애사건을 일으켰고, 에나는 남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자선사업에 전념을 하면서 지냈었습니다.



여섯 아이들과 함께 있는 에나



1931년 알폰소 13세는 내전을 막기 위해 퇴위해서 망명합니다. 가족들 모두가 함께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죠. 하지만 알폰소 13세와 에나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는데 권력을 잃은 알폰소 13세는 아내의 사회생활에 대해 간섭을 하게 됩니다. 그는 에나와 친분이 깊던 공작 부부에 대해서 그들과 못만나도록 합니다. 에나와 공작 부부 사이에 "루머"가 돌았기 때문이었죠. 이때 에나는 남편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면서 그들과 헤어지느니 남편과 헤어지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이후 에나와 알폰소 13세는 서로를 거의 보지 않고 지내게 됩니다. 에나는 남편이 죽은뒤에 에스파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왕실 가족들의 중심 인물이 됩니다. 에나는 에스파냐 왕실이 다시 복위하는데 힘을 썼었습니다.

에나는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의 장남인 펠리페가 태어나자 그의 대모가 됩니다. 당시 후안 카를로스가 프랑코 장군의 후계자로 지목되긴 했었지만, 정식으로 왕가가 돌아간것이 아니었죠. 이때문에 에나는 "왕비"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에스파냐에 가야했습니다. 에나는 기꺼이 증손자를 위해 에스파냐로 갔었죠.

에나는 1969년 로잔에서 사망했으며, 에스파냐 왕실이 복귀한 후인 1985년 에스파냐로 이장되어서 남편곁에 묻혔습니다.


후안 카를로스의 결혼식때던가 아니면 콘스탄티노스 2세의 결혼식때던가의 에나

그리스 왕실 결혼식때였는데 헷갈리는군요.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맨 마지막 사진 제외)

맨마지막 사진은 구글 검색중 (문제되면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