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ㅎㅎㅎ 이 글이 올라간다면 아마 제가 과수원에 가있을겁니다. 일요일은 돼야 집에 올수 있을거라서 댓글 달아도 답변 못해드립니다.-0-;;
사실 글을 쓰다가 말았거든요. 그래서 또 어디선가 썼던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 원래 이거 블로그에 안 올릴려고 했던 글인데 말입니다..ㅠ.ㅠ
시간이 없으니 막가져다 쓴다는...--;;;;
(..이러다가 베르나도트 전기 번역한것도 막 올릴지도 ...ㅠ.ㅠ )
영국의 조지 5세의 중혼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
조지5세
단독으로 보면 니콜라이 2세와 그리 많이 닮아보이지 않는것도 같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좀 비슷하긴 하네요. 역시 조지 5세가 좀 더 성깔있게 생겼다는...--;;;
20세기초는 유럽의 여러 왕가에 매우 힘든 시기였다. 많은 나라에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이런 물결은 섬나라 영국에도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때문에 왕실에서는 어떻게든 왕정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 중심에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있었다. 그들은 왕실이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어야한다고 여겼으며 절대 국민의 뜻이 담긴 의회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왕실을 비방하는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나왔다.
조지 5세의 즉위초 공화정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지 5세가 사실 메리 왕비와 결혼하기 이전 한 여성과 결혼했으며 이때문에 메리 왕비와의 결혼은 무효이며,조지 5세의 후계자가 될 아이들(메리 왕비는 여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다섯아이가 아들이었다)은 모두 "사생아"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이야기를 들었던 왕실 측근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어이없는 이야기를 그냥 무시해버렸다. 조지의 죽은 형인 에디나 또는 조지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라면 모를까 조지 5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것을 당연히 알것이기 때문이었다. 규율을 엄격하게 지켰던 조지 5세가 그런 일을 할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수그러 들지 않고 점점 확대되어서 결국 나중에는 파리에서 책으로 출판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되자 나중에서야 자신에 대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지 5세는 격노했다. 다른것은 다 참을수 있지만 이런식의 모욕은 견딜수 없었을것이다. 이 소문은 왕가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조지에게는 이것은 그가 결혼전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에 대한 모욕으로 들릴수 있는 문제였을수도 있다.
조지의 아내
테크의 메리
그녀의 세례명은 원래는 다른 이름을 붙이려했는데 어머니의 사촌이자 대모였던 빅토리아 여왕이 "아이의 엄마 이름을 붙여야지"라고 하는 바람 메리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첫번재 약혼때는 메리가 아닌 "빅토리아"라는 이름으로 표기됐는데 조지와 약혼할때는 메리라고 표기되더라구요. (빅토리아도 세례명중 하나였음)
메리가 에디와 약혼한 이유는 순전히 그녀가 의무감이 강해서 좋은 왕비가 될것이라고 여긴 빅토리아 여왕의 영향력때문입니다.
조지 5세는 결혼전 한 여인에게 빠져서 정신없이 따라다녔고 이것은 왕실에서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지와 그녀는 결혼할수 없었는데 왜냐면 양가 어머니가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전 조지가 사랑한 여성은 조지의 사촌인 에든버러의 마리였다. 조지의 숙부인 에든버러 공작 앨프러드와 러시아의 여대공이었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장녀인 마리는 조지와 10살 차이가 났다. 수줍은 해군 장교였던 조지는 20대가 되었을때 역시 해군으로 숙부가 있었던 몰타섬에 자주 드나들었고 거기서 마리에게 호감을 가졌다. 겨우 10대 초반의 어린아이였지만 마리는 매우 예쁜 아이였고 조금만 기다리면 어여쁜 숙녀가 될 것이었다. 조지는 숙부의 집에 드나들면서 마리와 그 여동생인 빅토리아와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마리가 열여섯살이 되자 그는 대놓고 마리를 따라다녔다.
조지의 형인 에디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조지가 왕위계승자가 되어야했을때 조지는 마리와의 결혼을 원하다고 이야기했다. 두 아버지들인 버티와 애피는 이 결혼에 적극적으로 동의했지만 두 어머니들인 알렉산드라와 마리는 결사 반대했다. 동서지간에 사이는 극악이었으며 특히 마리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은 영국 사교계를 끔찍히 싫어했다. 공작부인은 딸에게 조지와 결혼할수 없다고 편지를 쓰라고 강요했으며 결국 마리는 조지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후 공작부인은 딸을 루마니아의 왕위계승자에게 시집보내버렸다.
이렇게 조지의 사랑은 끝났으며,그는 의무로 형의 약혼녀였던 메리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후 둘은 점차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서로에게 가장 의지가 되는 사이가 되었다.
아들 니콜라예 왕자와 함께 있는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녀이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의 외손녀였죠.
(참고로 제가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들중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두사람중 한명입니다. 다른 한명은 헤센의 알릭스-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황후)
이랬던 그에게 뜬금없는 결혼 이야기는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을것이다. 조지 5세는 분노로 이 책의 저자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려했다. 하지만 의회가 이를 반대했다. 왜냐면 그는 국왕이었으며 국왕이 명예훼손으로 직적 고발하는것은 판사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의회는 대신 조사를 한후 국왕을 대리해서 명예훼손으로 고발할지 말지 결정하기로 했다. 의회는 조사후 모든 사건의 관련자가 살아있을때 재판을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국왕을 대신해서 명예훼손으로 출판업자를 고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국왕 스스로가 증언을 하겠다고 나서자 이는 거부당했다. 국왕이 재판장에 오는것만으로도 압력이 될수 있다는 의미였다.
재판하는 동안 많은 사실이 밝혀졌다. 국왕이 비밀결혼했다고 이야기가 나온 여성은 실제로 국왕을 만난적도 없었다. (아마 마리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을텐데 그 이유는 마리가 당시 루마니아 왕위계승자의 부인이었기에 이런 스캔들에 연류되는것은 껄끄러운 일이었을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왔으며 모두 국왕이 중혼한적이 없다는 증언을 했다.
책을 출판한 사람은 변호를 포기했으며 공화정을 원하던 사람들은 그를 그냥 내버려 뒀다. 결국 국왕의 중혼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면서 끝났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당시 영국 왕실을 흔들려던 많은 이야기들중 하나였고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왕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노력해야했는지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일 것이다.
조지 5세와 메리 왕비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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