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얼마전부터 에바 페론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했는데 오늘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왜냐구요..기분이 꿀꿀해서요...
우울할땐 글쓰는것이 제일 좋거든요.--;;;;;
그리고 해야되는 이유도 있구요...ㅎㅎㅎ
사실 에바 페론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에비타"의 주인공 : 에바 페론
에바 페론
마리아 에바 두와르테 데 페론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부인
María Eva Duarte de Perón
(1919–1952)
"에비타"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에바에 대한 사랑을 담아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후에 "에바 페론"이라고 알려지게 되는 마리아 에바 두와르테는 1919년 아르헨티나 접경의 파라과이의 한 마을에서 태어납니다. 에바의 아버지인 매우 부유한 바스크이민자로 후안 두와르테는 이미 본처가 있었음에도 에바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남성이 여러 여성과 사는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920년 에바의 아버지는 에바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버리고 자신의 본처에게 돌아갑니다.
에바의 가족들은 사회에서 몹시 냉대를 당했는데 특히 사생아들에 대해서 아르헨티나 사회가 엄격했기 때문입니다.이때문에 후일 에바는 자신의 출생기록을 파기했고, 결혼때는 다른 출생기록을 쓰기도 했습니다. (에바의 아버지는 떠나기전 자녀들을 인정했기에 아이들은 아버지의 성을 쓸수 있었습니다.)
어린시절의 에바
아버지가 떠난후 어린시절 매우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후 이복오빠의 도움으로 좀더 나은 생활을 했습니다. 어린시절 에바는 영화배우를 꿈꿨는데, 에바의 어머니는 에바를 적당한 혼처로 시집보내고 싶어했었습니다.
결국 15살이던 1935년 에바는 영화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갑니다. 에바의 자매들은 "에비타"에서와 달리 에바는 어머니와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갔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1935년 3월에 극장에서 배우로 정식으로 데뷔합니다. 이후 극단의 단원,모델,B급영화의 단역등으로 일했던 에바는 1942년에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에바는 한 라디오 드라마를 지원하던회사에 소속되어 라디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죠. 이후 에바는 여러 라디오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인기가 올라갔고 1943년에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라디오 드라마 배우가 되었습니다. 또 에바는 영화에 한편 출연했는데 이또한 대 성공을 거뒀습니다.
1935년
1944년 아르헨티나의 산 후안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합니다. 이에 노동부장관이었던 후안 페론은 희생자들을 위한 기부공연을 하기로 했고, 이때 에바와 만납니다. 48살의 후안 페론과 24살의 에바는 첫눈에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곧 동거에 들어가죠
이것은 후안 페론 주변인물들에게 스캔들로 발전됩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정치인과 배우는 다른 사회계층으로 인식되었는데다가 둘이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하는것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일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후안 페론은 에바를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정치적 조언자와 동지들에게 소개시켰고 그들과 함께 여러가지를 의논할때 에바를 동행했습니다.
이후 후안 페론은 에바를 방송인 조합의 회장으로 당선시켜줬으며, 에바는 후안 페론을 지지하는 라디오 드라마의 주인공이 됩니다.
1945년
대통령과 함께 있는 후안 페론(오른쪽)
하지만 에바의 삶이 극적으로 뒤바뀌는 사건이 1945년 일어납니다.
군부가 점차 권력을 가지는것을 두려워했던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후안 페론의 실각을 노렸고 1945년 10월 그를 체포합니다. 그가 수감되자 20만에서 30만명이상의 사람들이 그를 석방하라고 시위를 했으며 의회 역시 그의 석방을 요구했고 체포된지 6일만에 후안 페론은 석방되죠. 유명한 앤드류 로이드웨버의 작품인 "에비타"에서 에바는 이때 큰 역할을 한것으로 나옵니다만, 사실상 당시 에바는 후안 페론의 동료들과 거리가 있었으며, 언론에서도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후안 페론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올랐으며 후안 페론은 석방 된 다음날 바로 에바와 시민예식을 올립니다. 종교예식은 12월에 치르죠.
후안 페론의 체포 당시 에바의 역할은 미미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석방된후 에바와 바로 결혼했습니다. 결국 후안 페론의 체포와 석방은 그의 인기를 더했을 뿐만 아니라 "에비타"의 신화가 만들어질 배경이 되었죠.
1945년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
시민 예식 사진인듯
1946년 후안페론이 대통령 선거에 나가자 에바 페론은 남편을 돕기 위해 정치 유세에 적극적이됩니다. 남편을 위해 라디오 연설을 했으며 남편을 따라 전국을 돌며 선거 유세를 했죠.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정치가의아내가 이렇게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것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에바는 부유한 군인 출신의 정치가의 아내일뿐이었습니다만, 실상 에바는 라디오를 통해 전국민이 알고 있던 스타였고 그녀에 대한 인기는 엄청났죠. 이때이후 에바는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해집니다.
남편 후안 페론과 함께 대중앞에 있는 에바 페론
남편이 대통령이 된후인 1947년 에바 페론은 유럽 순방에 나섭니다. 이는 유럽 특히 스페인쪽과의 긴밀한 관계를 위한 것이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에바 페론이 간것이죠. 이때 에바는 수많은 정치가들을 만났는데 이 아름다운 여인에 대해서 유럽 전체가 호의를 가지게 되고 곧 아르헨티나와의 우호적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때 뉴욕타임즈에서 에바페론의 방문에 대해서 두세계를 잇는 "무지개 다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이는 유명해지게 됩니다.
유럽 순방중
대통령 영부인으로써 에바 페론은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빈민과 여성을 위한 여러 사업들을 진행했죠. 아르헨티나 대통령 부인들의 전통적인 의무도 주로 자선사업등을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당시 상류사회의 여성들은 정규교육도 받지 않았던 "미천한"배우이자 한때 "정부(情婦)" 였던 여성을 받아들이기 거부했죠. 이때문에 에바는 자신의 새로운 단체를 설립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바 페론 재단"으로 에바는 여기에 엄청난 돈을 기부합니다. 비록 이 재단이 부정축재를 한돈을 빼돌리는 창구라는 의심도 있지만 에바는 재산 상당부분을 여기 기부했으며 에바의 인기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물품이나 돈을 기부했던 평범한 재단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기부받은 돈으로 이곳은 학교병원등을 마을들을 건설했으며,장학금을 수여하고, 여러 다른 자선 사업을 했습니다.
특히 자선사업을 하면서 에바는 늘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만났고 만나는 이들을 무조건 도와줬습니다. 이때문에 에바는 점차 "성모"의 이미지로 정착되었습니다. 에바는 가난한 이들을 만났을때 그들에게 키스하고 그들이 에바에게 키스하는것을 허락했습니다.. 병든 이들과의 신체 접촉을 꺼리지 않았죠. 이런 상호 관계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특히 한센병 환자나 매독환자와의 접촉도 꺼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는 "대통령의 부인이 아니라 성모의 이미지"로 바뀐것이죠. 에바는 점차 자선사업에 몰두했는데 죽기 전에도 하루에 약 20시간가량 가난한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에바 페론 재단에서의 에바 페론
비록 정치적 영향력을 위한것이긴 했지만 에바 페론은 여성 정당을 창당했고 이들은 에바 페론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매우 활발한 정치활돌을 벌였습니다.
에바가 정치적으로 한 일중 하나는 사생아가 차별받지 않게 한것입니다. 스스로 사생아였기 때문에 이런 차별을 철폐하려한것이었죠.
1951년이 되자 대통령 선거에서 에바 페론이 부통령으로 나서야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정치를 장악하고 있던 군부가 이를 승락할리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대통령이 사망할 경우 대통령직이 바로 부통령에게 인계될것이기때문이었죠. 하지만 노동자들은 에바 페론을 지지했고 그녀가 부통령으로 나오라고 시위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에바는 그들에게 자신의 건강때문에 부통령으로 나설수 없다고 밝힙니다.
1950년 초 이미 에바는 병으로 고통을 느끼고 있었죠. 그리고 1951년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습니다. 에바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는데 1951년 10월에 공식석상에서는 남편에게 겨우 의지해서 군중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1951년 10월 공식석상에서의 에바 페론
이미 이때 약해질대로 약해졌다고 합니다.
1952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으로 당선된후 당선 축하 퍼레이드에 참석했지만 며칠후 사망합니다. 매우 고통스러워 했으며 죽을 당시 몸무게도 겨우 36kg밖에 되지 않았죠. 33살의 에바의 사망소식이 속보로 전해지자 아르헨티나의 모든 사람들이 일을 손에 놨습니다. 에바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뤄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에바의 장례식
에바가 죽은뒤 후안 페론이 망명하게 되자 에바의 시신 역시 사라집니다. 후안 페론에 대해 이름도 언급하지 못하게 했던 시절이었기에 "성모"의 이미지인 에바 페론역시 놔두면 안됐죠. 1971년이 되어서야 아르헨티나 군부는 에바의 시신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묻었다고 밝힙니다.
스페인에 망명중이던 후안 페론은 에바의 시신을 양도받았고, 그는 아내의 시신이 다시 없어질까봐 두려워서 집의 거실에 뒀습니다.이후 후안 페론이 다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후 에바의 시신도 다시 돌아왔죠.
현재 에바 페론의 시신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묘지에 묻혀있습니다. 이 묘지는 매우 엄중하게 보호되고 있습니다. 에바 페론의 전기 작가중 일부는 에바의 묘가 "핵폭탄에도 견딜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런 과도한 보호는 에바의 시신이 또다시 사라지게 된다면, 에바에 대한 이미지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다시 되살아날것이기에 이를 두려워해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에바 페론에 대해서는 아리송하다죠. 확실한것은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소외된 이들이 기댈수 있었던 인물이 바로 에바 페론이었고 이때문에 아르헨티나에서 그녀가 숭배받았을듯합니다.
에바 페론
1946년
...왜 갑자기 에바 페론 이야기를 하냐구요
일디보가 11월에 새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우리나라는 11월 8일 발매됐지만 다른 나라는 28일날 정식 발매일이거든요. 이 새 앨범인 Wicked Game중 Don't cry for me Argentina가 있답니다. 이 노래는 에바의 일대기를 다룬 앤드류 로이드웨버의 작품인 "에비타"에 나오는 곡이라죠.
이 노래를 들으니까 갑자기 에바 페론 이야기가 하고 싶더라구요.^^*
Wicked Game
- 아티스트
- Il Divo
- 타이틀곡
- Wicked Game (Melanconia)
- 발매
- 2011.11.08
프로모션 동영상
이 동영상에는 제가 아는 사람들(물론 그 사람들도 절 알아요) 두명의 손이 나옵니다.
얼굴이 나와도 괜찮은데 말입니다..-0-;;;
Il Divo의 Don't Cry for me Arhentina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쓰고있는글들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마스 & 우수블로거 선정 특집 : 에밀리 로이테 (0) | 2011.12.24 |
---|---|
선남선녀 왕족들....첫번째 (0) | 2011.12.09 |
그 마리테레즈는 아닙니다: 2011.11.20일 서프라이즈 중에서 (0) | 2011.11.21 |
오늘의 뉴스 AS: 마리 조제는 어느나라 공주였나? (0) | 2011.09.01 |
오스만 술탄의 하렘에 대한 서양의 인식 (0) | 2011.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