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인물들

30년 전쟁과 관련된 인물들...(3)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엘아라 2011. 9.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책을 집에 놔두고 와서 말입니다..ㅠ.ㅠ

두명의 신교도와 구교도측 지도자인 페르디난트 2세와 팔츠의 프리드리히 5세가 서로 반대측의 최고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둘 사이를 중재할 능력이 있던 사람이 둘이 있었습니다. 한명은 작센의 선제후였고 다른 한명은 바이에른의 공작이었죠.

바이에른은 팔츠의 선제후와 함께 비텔스바흐 가문입니다. 두 가문은 오래전에 분가한 상태였고, 팔츠의 선제후가 신교도 가문이었던 반면 바이에른 공작은  구교도 가문이었습니다.

 

이번에 이야기할 사람은 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막시밀리안입니다. 웨지우드의 책에서 그와 작센의 선제후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독일에서 전쟁을 막을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평가합니다.

 

 


30년 전쟁(1618-1648)

저자
C. V. 웨지우드 지음
출판사
휴머니스트 | 2011-06-13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깊은 안목과 섬세한 필치로 빚어낸 ‘유럽판 삼국지’!오늘의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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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과 관련된 인물들...(3)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바이에른의 공작 막시밀리안 1세

후에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Duke/Elector of Bavaria

(17 April 1573 – 27 September 1651)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뽑는 투표권을 가진 군주들을 "선제후"라는 칭호로 불렸습니다. 30년 전쟁이전의 선제후들은 일곱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세명은 세습 왕족이 아닌 사제들로 쾰른,마인츠,트리어의 선제후들이었습니다. 다른 네명은 세속의 군주들로 보헤미아의 국왕, 브란덴부르크의 마르크그라프(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라인의 팔츠그라프(팔츠의 선제후),작센의 공작(작센의 선제후)이 각각 선제후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제후로써 보헤미아의 국왕 지위는 좀 미묘했는데 그는 제국에 속한 군주가 아닌 독자적 군주였기 때문이죠. 30년 전쟁 무렵의 세력 양상을 보면 쾰른,마인츠,트리어는 사제들이었기에 구교측이었으며,브란덴부르크,팔츠,작센의 선제후들은 신교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헤미아의 국왕 지위는 보헤미아 의회의 결정이 있어야 했지만 일단 합스부르크가가 상속받았기 때문에 그동안 합스부르크가가 황제 지위를 유지할수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팔츠의 선제후가 보헤미아의 국왕 지위를 받아들인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의 부모

바이에른의 공작 빌헬름 5세와 로렌의 레나타

빌헬름 5세는 바이에른 공작령을 매우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는데 이때문에 바이에른 공작령에서 신교가 유행하는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의 통치기에 마녀사냥이 유행한것도 이런 그의 관점과 관련있다고 합니다.

레나타는 로렌 공작인 프랑수아1세와 덴마크의 크리스티나의 딸로 레나타의 외할머니는 부르고뉴의 이사벨라로 후아나 라 로카와 "미남왕" 필리프의 딸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레나타는 합스부르크가와도 친척관계였습니다.

 

 

팔츠의 선제후가 된 후의 막시밀리안

팔츠의 프리드리히 5세를 물리친것은 바로 막시밀리안의 군대였습니다. 이에 페르디난트 2세는 막시밀리안에게 프리드리히 5세의 지위인 팔츠의 선제후 지위를 부여합니다. 이는 다른 독일 군주들에게 동요를 가져온 사건이었는데, 자신의 영지를 뺏길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확산시켰습니다.

이후 30년 전쟁이 끝난후에 팔츠의 선제후령은 다시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에게 돌아갔고 그는 바이에른의 선제후 지위를 부여받습니다. 그래서 선제후는 모두 여덟이 되었는데 이후 팔츠의 선제후령이 카톨릭 가문인 팔츠-노이부르크 가문에게 돌아가자 선제후들은 다시 신교도 선제후를 한명더 추가합니다. 바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으로 보통은 "하노버의 선제후"라고 알려지게 됩니다. 바로 영국의 조지 1세이 아버지로 조지 1세 역시 하노버의 선제후 지위를 가지고 있었죠.

 

막시밀리안 1세와 두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막시밀리안 1세는 사촌인 로렌의 엘리자베트와 첫번째 결혼을 했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전염병이후 아내가 죽자 그는 서둘러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와 결혼합니다. 둘의 결혼은 정치적 목적보다는 막시밀리안1세의 후계자를 얻기 위한 결혼으로 둘사이에서는 모두 두명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막시밀리안 1세의 두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여대공

마리아 안나는 페르디난트2세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의 딸입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여기 근친결혼의 계보는 페르디난트2세와 마리아 안나는 사촌간이었지만, 페르난트 2세의 아버지인 카를과 어머니인 마리아 안나는 숙질간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여기도 꼬인족보입니다.--;;;)

마리아 안나는 매우 정치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녀의 관점은 친정인 합스부르크가문의 이익보다는 남편의 가문인 바이에른의 이익에 촛점이 맞춰졌다고 합니다.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아 안나의 카메오

막시밀리안 1세는 첫번째 아내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만, 두번째 아내에게는 좀 달랐던듯합니다. 아내와 나이차가 많이 났을뿐더러 두 아들을 낳아줬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0-;;;

 

 

 막시밀리안 1세가 새겨진 동전

갑옷을 입은 모습이죠.

 바이에른 공작 시절의 막시밀리안 1세의 문장

선제후가 된후에는 가운데 보주가 추가된 모습입니다.

 

 

 

막시밀리안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뒤를이어 바이에른 선제후가 되는 페르디난트 마리아

....합스부르크가와 근친결혼으로 인한 주걱턱과 과도한 코 역시 여기서도 살짝 보입니다.--;;;

하지만 나이든후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모습에서는 턱이 자라다 만 모습이라죠.

하지만 후손들의 초상화에는 합스부르크 립이 명확하게 보입니다.-0-;;;;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Maximilian_I,_Elector_of_Bavaria